한국 전쟁 고아들을 돕기 위해 시작된 세계적인 구호단체 월드비전 한국 제7대 회장으로 전쟁고아 출신인 박종삼(朴宗三·67) 전 숭실대 사회사업학과 교수가 선출됐다. 월드비전은 한국전쟁으로 어려움에 처한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미국의 밥 피어스 목사와 한경직 목사가 1950년 공동 설립한 국제구호단체. 지금은 1만 3,965명의 직원이 연 9억5,000만 달러(2001년 기준)의 예산을 들여 전세계 100여개국에서 170만명의 아동을 구호하고 있다. 월드비전 한국은 20개국의 빈곤국가 후원과 더불어 북한 돕기, 국내결연사업등을 펼치고 있다. 2002년 예산 294억. 특히 94년 시작한 북한 후원은 현재 하루 4만명을 먹일 수 있는 국수공장 가동과 연 400만톤의 감자 생산을 목표로 하는 씨감자 보급사업이 유명하다. 북한 민족경제협력련합회가 옥수수재단과 더불어 유이하게 협력하고 있는 곳이 월드비전이기도 할만큼 월드비전의 지원방식은 식량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개발사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황해도 신천 출신인 박 회장은 51년 단신 남하, 가난과 굶주림이라는 어려움을 뚫고 서울대 치대에 입학했으나 치과의사라는 안락한 삶을 버리고 사회복지사업에 뛰어들어 평생을 살아왔다. 23일 이·취임식을 앞둔 박 회장을 만나보았다.
―창립자인 피어스 목사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는데 회장이 되신 소감이 남다르시겠어요.
"제가 1.4후퇴 때 피난 나왔는데 53년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오니까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거리의 소년이 된 것이죠. 독립문에 허름한 땅굴 같은 것을 짓고 친구 두 명하고 사는데 절망적이었지요. 이북에서 모태 기독교 신앙을 가졌기에 교회에는 나가려고 하는데 미국사람이 부흥회를 한다고 해요. 한경직 목사님이 통역을 하고 월드비전 회장인 밥 피어스 목사가 설교를 하는데, 제가 그 분 설교를 들으면서 마음이 편안하고 희망을 갖게 되더라구요. 재미있는 것은 제가 72년도에 남가주대학에 박사학위를 하러 가서 할리우드 장로교회를 갔는데 거기서 모금하러 온 피어스 목사님을 만났어요. 그 분이 월드비전을 그만 두고 월드비전의 구호기금을 걷기 위해 '사마리탄 주머니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그 단체 이름으로, 부자 동네에 있는 할리우드 장로교회에 모금하러 오신 것이지요. 제가 한국사람이니까 인사를 했지요. 제 소개를 듣더니 즉석에서 '이북에서 피난나온 고아였는데 지금 박사학위를 하고 있다' 그러면서 모금을 하는 거에요. 월드비전의 회장을 맡아 북한을 돕는 일까지 하게 되니 하느님이 내게 어려움을 통해 꼭 필요한 교훈을 주셨구나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월드비전의 도움은 받아보셨습니까?
"제가 '세상 사람들이 내가 배고픈 것을 알면 도와줄텐데' 싶으면서도 도와달라고 가게 되지는 않더군요. 가난한 사람들은 자존심 때문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있는 사람이 찾아가서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 제 소신입니다."
―회장을 맡으시면서 옛날 일이 주마등같이 펼쳐지셨겠군요.
"그렇죠. 이북에서 피난나와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거든요. 미군폭격에 죽을 뻔도 하고 굶어죽을 것 같은 배고픔도 겪어봤습니다. 그런데 월남할 때 옹진에서 탄 배가 인천 부근에서 파산을 당했는데 그러면 다들 최후의 이야기를 다 하잖아요. 친구들끼리 같이 죽자고 혁대를 같이 묵고 있는데 저는 아주 엉뚱하게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하느님 나 살려주시면 일생동안 하느님을 위해 봉사할게요'
―대개는 그렇게 해도 그 말을 다 지키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나는 그 말이 딱 박혔어요.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에는 입주 과외교사를 해서 먹고 살게 되었지요. 대학 들어가는 데도 어려움이 없었구요. 그 때 '내가 이렇게 죽을 고비를 몇 곱을 넘겼는데 지금 이 고생을 나몰라라 잊어먹고 그 다음에 치과의사가 되어 잘 산다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북에서 같이 피난 나온 애들이 그때 벌써 돈암동에서 깡패가 되었달지 자살을 했달지 고통을 당하고 살고 있었는데, 해방촌 사람들도 자꾸 생각나고. 이 고생은 돈주고도 못사는 고생이요, 전쟁속에서 살아남은 경험인데, 이걸 나몰라라 하는 것은 억울하니까 '이 경험을 꼭 살려서 어떻게해서든지 치과의사를 잘하게 되면 가난한 사람을 돕겠습니다' 이렇게 두번째 결심을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살겠다고 결심하고 선교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를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무의촌을 다녀보니 굳이 외국을 나갈 필요가 있나 우리나라에도 도움의 손길이 많이 필요한데 싶어서 광주기독병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광주에서는 보이스타운이라는 무의탁 비행청소년 마을을 세우신 걸로 유명하시던데요.
"광주기독병원에서 레지던트를 하면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면 끝나는데 제가 오전 5시에 일어나서 고아원 양로원 윤락여성 시설을 다니면서 진료를 했습니다. 병원일이 끝나면 다시 밤 10시까지 고아원 양로원 다니면서…진료만 한 것 아니고 양로원에 난로가 없으면 모금해서 난로 사다주고, 옷 사다주고, 의사들이랑 같이 진료활동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다리 밑에서 거지애들을 봤어요. 소년원에 가보니 부모들이 없는 애들이 태반이에요. 나가려도 보호자가 없으니 나갈 수가 없어요. 진료를 하면서 다리 밑에 아픈 애 어떻게 됐지, 소년원에 걔 나와야 하는데, 보호자 없지, 나더러 도장 찍으라는데 어떻게 하지, 이 생각이 자꾸 나니까 못 하겠더라구요. 그 때 제가 깨달았어요. 인간의 입이 너무 작다, 치과진료만으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너무 힘들다. 그래서 소년원 출소후 무의탁 청소년들이 살 수 있는 보이스타운을 만들게 됐습니다."
―북한에 다녀오셨지요? 51년만에 북한땅을 처음 밟으신 것인가요?
"회장으로서 업무 파악을 위해 11월 29일부터 12월 4일 사이에 평양 정주 안주 묘향산 지역을 갔다 왔습니다. 월드비전이 북한에 하루 4만∼5만명을 먹이는 국수공장을 가동하고 있습니다. 토마토 오이 키우는 수경재배 시설도 있고요, 이북 농업과학원과 공동으로 하는 씨감자 생산도 지원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필요한 식량이 연 600만톤이라는데, 씨감자 생산이 잘 되면 연 450만톤 정도를 생산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제가 10대때 북한에서 나와 굶주림을 겪었는데 이제 북한의 굶주린 이들을 돕는다는 것이 말로 못하게 감사합니다."
―북한을 돕는 사업은 계속 하실 계획이신가요?
"사람이 굶고 있는데 안 도와주면 어떻게 되겠소?"
―일부에서는 북한을 고립시켜 빨리 현 정권을 붕괴시키는 것이 빨리 북한 주민을 구하는 길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요.
"정치적인 해결방법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나 시급한 것은 굶는 사람이 있고 이들을 빨리 도와주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그런 식으로 주장한다면 우리나라가 독재정권일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는데 외국에서 저들을 도와주는 것은 독재정권을 위하는 일이니 안 된다고 하면 우리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았겠습니까. 식량을 무기로 정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절대로 안됩니다. 북한 자체도 분명히 변하고 있습니다. 사실 월드비전이 기독교 인도주의 단체인데 그걸 받아들인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회장으로서 주력사업이 있다면
"월드비전의 정신에 더욱 충실하겠습니다. 우리는 '변화시키는 발전'(Transformation Development)을 중시합니다. 가난하고 압제받는 이들을 도와서 그들이 스스로 변화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었던 것은 월드비전을 후원해주는 교회, 일반 시민, 한국사회의 양심이 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자기를 도와주는 사람들을 잊지 말아야죠. 이들에게 월드비전이 하는 일을 더 많이 설명하고 활동에 더 동참하라고 권하려고 합니다."
―후원자들에게 더 많은 역할을 요구하는 셈이네요
"돈만 던지지 말고 마음을 던져달라고 할 겁니다."(웃음)
/hssuh@hk.co.kr
● 약력
1936년 황해도 신천 출생
1951년 단신 월남
1960년 서울대 치대 졸업
1962년 장로회 신학대학 졸업
1968년 미 프린스턴 신학원 목회석사
1970년 미 버지니아 커먼웰스대 사회사업학 석사
1970∼1998년 광주보이스타운(무의탁 비행청소년 마을) 원장
1975년 미 남가주대 사회사업학 박사
1979∼2001년 숭실대 사회사업학과 교수
현재 월드비전 회장, 한국자원봉사단체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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