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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703)원산 총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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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703)원산 총파업

입력
2003.0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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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월22일 원산노동연합회(원산노련)가 총파업을 선언하면서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 파업인 원산 총파업이 시작됐다. 한국 노동운동사에서만이 아니라 항일민족해방운동사에서도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원산 총파업의 불씨는 그 전해 가을에 처음 지펴졌다. 1928년 9월8일 영국인이 경영하는 라이징 선(Rising Sun) 석유회사 문평리(함남 덕원군) 유조소에서 일본인 현장 감독이 조선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이 일어나자,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인 감독 파면과 최저임금제 확립을 포함한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문평 노조의 상위 조직인 원산노련이 개입하며 파업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자, 회사측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해 파업은 9월28일 일단락됐다.그러나 회사는 약속 기한 3개월이 지나도록 협정을 지키지 않았고, 이듬해 초부터 원산부두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파업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총파업의 직접적 원인은 1월21일 원산 지역 일본인 자본가 모임인 원산상공회의소가 원산노련 소속 부두 노동자 450명을 해고하고 노련에 소속된 노동자들을 고용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린 데 있었다.

이튿날인 1월22일 원산노련은 총파업을 단행했다. 총파업은 그 해 4월6일 원산노련이 조합원들의 자유 의사에 따른 작업장 복귀를 결정할 때까지 계속됐다. 이 기간에 일본인 자본가들은 경찰과 함흥 보병대의 지원을 받아 원산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폭력배들을 동원해 만든 함남노동회라는 어용 노동 단체를 통해 노동자들을 이간질했다. 전국 각지와 국외에서의 지원과 격려에도 불구하고, 지도부가 구속되고 쟁의 자금이 바닥나면서 총파업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원산 총파업은 일제 하 한국 노동자들의 계급의식과 민족의식을 크게 키워주었다.

고 종 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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