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미 직원들은 창업 이후 40여년간 어느 기업보다도 돈독한 유대감으로 다진 결속력을 자랑한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 자신 직원들에게 항상 동종 업계 최고 수준 대우를 해줬다고 자부하고 있고 지금도 그 약속은 지켜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모나미는 큰 노사분규를 겪지 않았다. 1987년 노태우(盧泰愚) 민정당 대표의 6·29선언 이후 민주화 바람이 불고 노동운동이 활발해질 때 한 두차례 노사 분규를 겪은 것을 빼곤 모나미 사업장은 노사간 이해와 믿음으로 어느 곳보다 평화로웠다.물론 노사관계에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모나미는 1960년 광신화학으로 출발했을 때부터 퇴직금 누진제를 실시해왔다. 노사 합의로 채택된 퇴직금 누진제는 능력있는 사원들이 '평생 직장'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근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줬다. 덕분에 1960, 70년대 성장기에 모나미에는 어느 기업체보다 현장 경험이 많고 기술력이 뛰어난 고참 사원들이 많았다. 그들 덕분에 모나미가 성장에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회사 연륜이 30년을 넘어서기 시작하고 장기 근무한 직원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퇴직금 누진제는 회사 자금 사정을 압박하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초창기 때야 퇴직금 누진제는 문제도 되지 않았다. 생산직 사원들의 임금이 낮아서이기도 했지만 워낙 평균 재직 기간이 짧아 누진제를 적용해도 퇴직금 문제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문구업체가 늘어나 가격 경쟁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에 누진제를 적용한 퇴직금 지급 문제는 회사 입장에서는 상당한 자금이 필요한 일이었다. 고참 사원이 퇴직할 경우 많게는 1인당 억대에 이르는 퇴직금을 지급해야 하니 대재벌 그룹도 아닌 중소기업 모나미로서는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다. 회사를 위해 오랫동안 일해온 직원들 입장에서는 바람직하지만 당장 회사 사정이 따라주질 않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1984년 나는 한국생산성본부가 일본생산성본부와 함께 도쿄(東京)에서 개최하는 기업 경영 세미나에 참석했다. 세미나 도중 잠시 휴식 시간을 이용해 한 일본 기업체 사장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친구의 말이 충격적이었다. 그는 " 만일 한국에서 화폐를 발행하는 한국은행이 퇴직금 누진제를 실시해 직원들이 동시에 퇴직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천하의 한국은행이라 해도 문을 닫고 말 것" 이라고 퇴직금 누진제의 폐해를 강조했다. 나는 귀가 번쩍 트였다. 만일 모나미의 고참 사원 30, 40명이 한꺼번에 퇴사를 하겠다고 하면 회사는 퇴직금을 주기도 전에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그만한 돈을 퇴직금 충당금으로 적립해 놓지도 않았거니와 그만한 돈을 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나는 귀국하자마자 자금담당 이사에게 퇴직금 현황을 챙겨보도록 지시했다. 보고내용은 비관적이었다. 회사는 정년 퇴직하는 직원들에게 퇴직금을 지급하는 것만으로도 적자 상태로 빠지게 돼 있었다. 고민을 거듭했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노사간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조항을 회사가 어렵다고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현재의 자금사정을 노조측에 다 공개하고 이해를 구하는 방법 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노조측과 접촉을 시도했다. 그러나 노조측이 퇴직금 누진제를 양보할 리 만무했다. 그로부터 노조측을 상대로 한 기나긴 설득전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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