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귤나무가 '대학나무'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감귤나무 한 그루면 자식 대학공부도 거뜬했기 때문이다. 돌 많고 바람 많아 척박한 제주는 감귤농사에 기대 그렇게 40년을 버텼다. 하지만 이제 농민들은 "행여 다칠 새라 오두막 짓고 지켰다"던 감귤 밭을 제 손으로 결딴내고 있다. 19개 지역농협조합장은 최근 가격폭락에 따른 긴급대책회의를 열고 애써 수확한 "감귤 2만 톤을 폐기하게 해달라"고 도에 건의했다. 폐원, 휴식년제, 간벌, 품종 개량 등 정부 대책은 쏟아지고 있지만 감귤 농민들은 "농정을 못 믿겠다"며 분통을 터뜨렸다."애지중지 키운 자식을 내 손으로 절단 내고 있수다."
제주 북제주군 애월읍 상귀리의 한 감귤원. 주인 이창현(67)씨는 넋이 반쯤 나갔다. 황금같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섰어야 할 750여 그루 2,000평 감귤밭이 폐허로 바뀌고 있었다. "15년을 키웠는데 끝장나는 데는 3시간이여." 이씨의 탄식은 굴삭기의 '철커덕…, 윙…' 기계음에 묻히고, 또 한 그루가 뽑혀 나갔다. 묻는 말엔 대꾸도 없던 이씨가 돋보기 너머 눈자위를 훔치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무슨 구경 났다고 몽땅 몰려오는지 몰라. 똥값 될 때는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전날 공무원들의 폐원 현장 답사가 괘씸했던지 이씨는 참았던 불만을 쏟아냈다. "여름 내 가지치고 약 주고 거름 깔고… 요만하던(10㎝) 놈들이 막내 아들보다 더 컸는데 그것들을 내 손으로 뽑아야 지원금이라도 준답디다." 버려진 감귤더미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그가 찌그러진 감귤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인건비에, 농약 값에 지금껏 땅에 돈 뿌렸으니 빚도 저만큼 쌓였을 거요. 폐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올해도 제주도내 300㏊의 멀쩡한 감귤원이 사라질 예정이다.
감귤 주산지로 꼽히는 서귀포 일대. 감귤값 폭락으로 썰렁할 법도 한데 작목반 선과기는 쉴 틈 없이 돌고 있었다. '정확한 선과로 비과(非果)를 줄이자'는 플래카드가 새마을 운동 표어처럼 내걸린 서귀포시 법환작목반 400평 선과장엔 10여명의 주민들이 감귤 고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노란 바구니에 가득 담긴 감귤이 선과기를 돌고 돌아 크기에 따라 1∼9번 구멍을 통해 상자로 떨어졌다. 중간 크기인 4,5,6번이 상품(上品), 1,9번은 너무 작거나 너무 커 비과로 분류된다. "똥값이지만 출하시기 놓치면 그나마도 못 건진다"던 강희섭(46)씨는 기자의 질문에 생뚱 맞게 응수했다. "농사꾼 마음이 선해서 웃고 있지, 다들 죽지 못해 살고 있수다. 빚 내서 하루하루 버티는 생활을 일일이 설명하란 말이오." 옆에서 이야기를 엿듣던 아주머니들도 한마디 거들었다. "미깡(감귤)만 보면 울화가 치미는데 밤 늦게까지 골라봐야 돌아오는 게 없서예."
돌담을 끼고 늘어선 나무엔 아직 따지 못한 감귤들이 겨울 바람을 맞고 있었고, 나무 주위에도 멀쩡한 감귤이 버려진 채 널려 있었다. 농장마다 설치된 저장창고에는 출하를 기다리는 감귤이 노란 바구니마다 가득 담겨있다. "3월 전까지 못 팔면 그땐 썩은 쓰레기 치우느라 또 돈이 들어갈 판입니다." 문윤부(49)씨는 "자꾸 값이 떨어져 생긴 손해를 메우려니 경작 면적만 늘어나 일손도 달려요. 질이 떨어지는 미깡은 거름이나 할 요량으로 따자마자 버립니다. 그것도 왕년에는 없어서 못 팔았는데…"라며 혀를 찼다.
감귤 값 폭락은 4년 전부터 시작됐다. "돈이 된다니까 너도 나도 사다 심은 게 화근이었다"는 한 주민의 푸념처럼 경작지 증가는 치명적이었다. "원래 감귤 주산지는 서귀포 남제주 일대인데 산북(한라산 이북) 사람들까지 미깡을 하는 통에 양만 늘고 맛은 떨어졌다"는 원망도 들렸다. 유일한 겨울 과일이었던 감귤을 위협하는 대체작물의 등장도 감귤 폭락에 한 몫 했다. 감귤 농민들은 감귤과 비슷한 오렌지보다는 하우스에서 재배되는 딸기를 주적(主敵)으로 지목했다. 감귤 농사는 여름철 일조량이 중요한데 지난해엔 비까지 많이 내려 당도를 떨어뜨렸다. 김모(53·북제주군 조천읍)씨는 "수명이 다한 땅에 화학비료로 버틴 것도 맛을 떨어뜨린 이유"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농민들은 출하 조절 시스템이 없어 감귤의 가격이 폭락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 농민은 "면적 줄이고 품질 높이는 것도 좋지만 우리가 아무리 좋은 미깡을 골라내도 일반 상인들이 비과를 싼 값에 사 육지에 팔아먹으면 말짱 헛일"이라고 불평했다. 또 다른 농민은 "각 지역조합 대표가 모여 출하량을 줄이자는 결의를 한 다음날이 출하량이 가장 많다"면서 "도에서 중심을 잡고 출하량을 조절하지 않는 한 800개가 넘는 선과장에서 '나 하나쯤이야' 하는 심보로 감귤을 쏟아낼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귀포 작목반 선과 작업은 저녁 7시가 넘도록 멈출 기미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선과되지 않은 감귤이 노란 바구니마다 수북했다. "저건 약과야. 농장 창고마다 쌓인 미깡은 어찌 처리해야 하나." 한 아주머니가 선과기에서 떨어지는 감귤에 맞춰 "빚 덩이 떨어지네"라며 한숨 장단을 맞췄다.
"평생 미깡 농사 지어 밥 굶지 않고 아이들 학교 보내고 살았는데 앞으로가 걱정이네." 한 주민은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미깡 생산하면 나라에서 제값 받을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라며 분을 삭였다.
주민들은 한사코 마다하는 기자에게 "어차피 똥값인데…"라며 15㎏ 감귤 한 상자를 내밀었다. 그리고 꼭 신문에 내달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제주 미깡 하영(많이) 사먹어 줍서예."
/서귀포·북제주=글·사진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고품질 상품으로 활로 뚫는다
"속상해서 미깡 당도 측정이나 하려고 나왔서예." 제주 서귀포시 토평동의 제주감귤농협 유통센터. 김안순(46·여·서귀포시 동홍동)씨가 종이 가방에 담은 감귤을 센터 직원에게 건넸다. "밭떼기로 넘겼는데 하루사이에 1관(3.75㎏) 값이 200원이나 떨어지니…." 그는 센터 직원으로부터 품질 좋은 감귤을 수확할 수 있는 방법까지 찬찬히 듣고 나서야 발길을 돌렸다.
지난해 11월 문을 연 유통센터는 제주 감귤의 몰락을 '불로초' '귤림원' 등 고품질 공동브랜드 개발로 헤쳐나가고 있다. 불로초는 화학비료와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은 당도 11도 이상, 산도 1% 미만의 최우수 상품이고 궁중 진상용 귤밭을 이르는 귤림원 역시 당도 10도 이상, 산도 1% 미만을 유지하고 있다. 포장 단위 역시 일반적인 15㎏에서 10㎏으로 줄이고 친근한 홍보 캐릭터도 만들었다.
감귤의 품질과 신선도를 보장하는 것은 최첨단 선별시스템. 크기로 감귤을 선별해 같은 상자에서도 맛 차이가 났던 기존 선과기와 달리 유통센터의 선과기는 센서로 감귤의 무게를 인식해 맛의 일관성을 유지했다. 또 물 세척과 열처리 과정 때 생기는 품질 저하를 막기 위해 특수 솔 세척 방식과 스팀건조, 송풍건조 방식을 도입했다.
감귤 가격 폭락에도 불구하고 귤림원과 불로초는 일반 감귤보다 1관(3.75㎏)당 2,000∼5,000원 높은 시세를 유지하고 있다. 입 소문이 나면서 일반상인에게 감귤을 넘겼던 농민들 역시 "불로초와 귤림원으로 출하하고 싶다"며 수확한 감귤의 당도를 측정하기 위해 유통센터를 찾고 있다.
/고찬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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