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마을에 70세가 넘는 노인이 없었지. 그 전에 모두 죽었거든. 간혹 있다 해도 집안에 누워서 죽을 날 기다리는 노인뿐이었지." "요즘은 70이면 한창이지, 요 근래 몇 년 동안 마을에서 송장 나간 일이 없었으니…." 강원도 양구군 고대리는 양구읍에서 20리 떨어진 전형적인 산골 외딴 마을이다. 별다른 구경거리가 없는 이 곳을 이번 겨울 가장 자주 찾은 손님은 눈이다. 여느 시골처럼 이곳에서도 젊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다. 일자리를 찾아, 또 공부를 위해 대부분 도시로 나간 까닭이다. 하지만 이곳을 지키는 노인들의 삶은 어디보다 활기차고 건강하다. 특히 노인회관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 자립기반을 갖추고 봉사횔동에도 열심이다. 때문에 서울대 체력과학노화연구소장인 박상철 교수에 의해 '전국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자립적인 실버마을'로 꼽혔다.전체 주민 100여명 가운데 65세 이상이 30여명이지만 노인회관 가입자격은 70세 이상이어서 회원은 24명이다. 70세 미만은 아직 젊다는 것이다. 남녀 비율이 똑같아 분위기도 부드럽다. 90세 고령자가 두 명이나 되지만 치매에 걸리거나 병치레를 전혀 하지 않는다.
고대리 노인들이 이렇게 건강한 것은 맑은 공기와 채소 위주의 식사, 산길을 오르내리느라 자연히 운동량이 많아지는 지형 덕분이지만 스스로 건강을 지키고 용돈을 벌어 쓰는 자립정신도 빼놓을 수 없다.
노인회관 큰 방에 걸려있는 운영지침은 '조직강화, 사회봉사, 자립자활'. 군대 하사관으로 퇴역한 김수갑(75) 회장의 신조는 "노인이라고 자식에게 얹혀 살면서 죽을 날만 기다릴 게 아니라, 우리도 아직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실제로 이곳은 담배와 화투가 소일거리인 다른 노인회관과 달리, 회원 모두 금연을 실천하면서 민속공예품을 제작·판매하고 그 수익금을 마을장학금이나 이웃돕기 성금으로 쓴다.
노인회관에서 공예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3년 전부터. 김씨가 회장이 되면서, "우리가 죽으면 짚신 꼬고 지게 만드는 방법도 같이 사라진다"며 전통공예 기법의 보존 및 전수 차원에서 일을 시작했다. 노인회관 바로 곁에 자리잡은 '고대리 수공예품전시관'에 전시된 물건들은 20여종. 짚신 지게 또바리 다리키 등 이제는 사라져 버린 민예품을 축소·복원해 군청에 들고 가 상담을 했더니, 고속도로 휴게소나 근처 제4땅굴 휴게소 기념품 매장 등으로 판로를 알선해줬다. 지난해에는 강원도와 자매결연을 맺은 일본 돗토리현과 중국에까지 수출했다. 적은 수량이지만 360여만 원의 수익을 올렸다.
손으로 하는 일이라, 작업량에 비해 만들어지는 물량이 적자 지난해 군청에서 멍석자리 짜는 기계를 제공했다. 이렇게 벌어들인 수익은 노인회관의 든든한 살림밑천이 된다.
노인회관은 고대리 노인들의 일터이면서, 휴식처이기도 하다. 쩔쩔 끓는 방에서 윷놀이를 하거나 자식들 얘기, 농사얘기를 하다가 김 회장의 부인 임귀섭(70) 할머니가 차려주는 점심을 먹고, 커피까지 끓여 마신다.
반찬은 두부 감자조림 된장국 등 건강식단이다. 술도 건강에 나쁘다 해서 회원 모두 반주 이상은 하지 않는다. 가끔 누가 '입이 심심한데…' 하고 운을 떼면, 김 회장과 총무가 장을 보아와 음식장만을 한다.
농번기가 되면 공예품 만드는 일은 잠시 젖혀두어야 한다. 노인회관이 개간한 2,000여평 밭을 경작하는 일도 노인들의 몫이다. '평생 농사만 짓다가 이제 좀 쉬자는데 또 밭일이냐'며 처음에 어깃장을 놓던 사람도 "쉬엄쉬엄 하는 밭일은 건강에도 좋다"는 김 회장의 설득과 일당 1만5,000원을 챙길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요즘은 더 적극적이다. 거두어 들인 수확은 노인회관 부식으로 쓰고, 장에 내다 팔아 살림에 보태기도 한다. '다 건강하게 오래 살자고 하는 일'이라는 김 회장이 나서, 가장 성공한 일은 마을 노인 전원의 금연 실천이다. 마을회관 안에서는 절대로 담배를 피울 수 없다는 강경 방침 때문에 나가서 피우던 노인들도 점차 담배를 끊게 됐다.
노인들이 모여 앉으면 화제는 자연히 건강으로 모아진다. "노인들은 아침운동이 나쁘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갑자기 추운데 나가서도 안돼요." 김 회장이 신문에서 읽은 건강정보를 알려주면, 옆에 앉은 한 할머니가 "난 그래서 집 안에서 운동해. 땀 날 때까지 뜀뛰기도 하고, 영감이 '정신없다'고 싫어하지만, 그래도 건강한 게 최고지."
/양구=김동선기자 weeny@hk.co.kr
■농촌은 나이드는데 복지는 도시중심
2000년 기준 전국 평균 고령화율은 7.1%이지만 읍 단위는 9.51%, 면 단위는 18%여서 지방으로 갈수록 고령화에 따른 문제가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농촌지역의 고령화율이 도시지역의 두 배에 이르고 독거노인이나 노인부부만의 세대 비율도 도시지역에 비해 읍·면 단위에서 더 높지만 이들을 지원할 복지 프로그램은 전무한 실정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2001년 전국 노인장기요양보호서비스 욕구조사'에 따르면 독거노인이 도시지역의 경우 17.8%인데 반해, 읍·면단위 시골은 27.6%였다. 자녀와의 동거율도 도시지역이 57.1%인데 반해 시골의 경우는 37%에 그쳤다.
그러나 노인복지 인프라가 서울 중심으로 짜여져 있는데다, 노인복지 예산의 대부분이 국가재정이 아닌 지방자치단체 재정에 의존하고 있어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방은 '복지의 사각지대'로 남겨져 있는 실정이다.
부산동구노인종합복지관 김채영 관장은 "100% 국비지원으로 운영되는 장애인복지관과는 달리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받는 노인종합복지관의 경우, 지역의 재정자립도나 자치단체장의 의지에 따라 지원액수나 복지수준이 천차만별"이라고 지적했다. 서울의 경우 복지관 당 6억3,000만원이, 대구의 경우 7억이 지원되지만 부산의 경우 지난해 처음으로 4,000여만원이 나왔을 뿐이다.
읍·면 단위 노인회관의 경우 지역에 따라 난방비가 나오는 수준이 고작이고 이마저 없는 경우에는 주민자치회나 청년회 도움으로 근근히 운영되고 있다.
김 관장은 "노인복지 가운데 의식주 등 기본적인 내용은 국가재정으로 하고, 나머지 복지프로그램을 지방자치단체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김동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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