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참 아름답군요. 회색 대리석 같아요. 저기에 못을 박아 목이라도 매달고 싶은 심정입니다."가진 거라곤 아내밖에 없는 가난한 병사 보이체크는 아내가 군악대장의 유혹에 넘어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절망해서 외친다. 아내와 아기를 먹여 살리기 위해 미치광이 의사의 실험동물이 되어 학대에 시달리고 술주정뱅이 대위의 시중을 들며 모멸감을 느끼면서도 "나도 피와 살이 흐르는 인간"이라고 다짐하던 그는 결국 아내를 살해하고 물에 빠져 죽는다.
독일 극작가 게오르크 뷔히너(1813∼1837)의 '보이체크'는 부정한 아내를 죽이는 남편의 단순한 비극이 아니다. 뷔히너는 사회적 억압과 차별, 그로 인한 소외와 인간성 상실을 고발한다.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공연 중인 보이체크는 연출의 힘을 보여주는 연극이다. 예술의전당이 러시아 연출가 유리 부드소프를 초청해 만든 이 작품은 뷔히너 원작이 지닌 묵직한 에너지와 어두운 분위기를 뜨겁고 흥겹게, 또 비장하고 고통스럽게 전달하고 있다.
무대는 앞으로 30도쯤 기울어진 가파른 경사면이다. 힘 없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마구 짓밟히면서 정신적 분열에 빠져드는 보이체크의 내면을 닮았다. 불쌍한 한 인간을 파멸시킨 세상의 폭력을 암시하는 장치로도 보인다. 아차 하면 미끄러져 다칠 것 같은 이 위태로운 무대에서 배우들은 뛰고 구르고 춤을 춘다. 무대 왼쪽에는 철제 계단이 있고 바닥에서 한참 떨어진 공중에 아코디언 악사 세 명이 앉아 음악을 연주한다.
공연은 탱고로 시작한다. 배우들이 긴 코트를 입고 발을 굴러 마룻장을 울리며 춤을 춘다. 보이체크는 거칠게 붙들려 이리 저리 휘둘리며 억지로 춤을 춘다. 마지막 장면도 탱고다. 이번엔 각자 외투를 껴안고 홀로 추는 춤이다. 보이체크는 죽고 없다. 목이 없는 실물 크기 보이체크 인형은 바닥에 힘껏 패대기쳐졌다가 허공에 매달려 흔들거린다.
부드소프는 원작의 시적이고 암시적인 대사를 상당 부분 배우들의 신체 동작으로 대체했는데 몸의 언어가 말보다 더 위력적임을 실감케 한다. 배우들은 온 몸을 던져 열연하고 있다. 음악도 매우 중요하게 쓰이고 있다. 강렬한 탱고 선율은 보이체크의 슬픔과 분노, 고통을 표현한다. 화려하지만 쓸쓸해, 쓰라리게 비통함을 나타낸다. 보이체크가 아내를 죽이고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울려퍼지는 러시아 여가수의 울부짖는 듯한 노래도 가슴을 찌른다. 출연 박지일 김호정 윤주상 이대연 남명렬 장현성 등. 2월2일까지. (02)580―1300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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