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盧武鉉) '예비 대통령'의 투명한 행보가 도처에서 화제다. 지난 1개월간의 언행에서 거듭 부각되는 '노무현 스타일'의 특징은 물론 개혁을 목표로 해 변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그래서 과거의 관행에서 탈피, 새롭게 바꿔보려는 실험성이 두드러지고 이는 때로 파격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노 당선자가 18일 전격적으로 여야 총무와 만나 협조를 요청한 것도 대통령과 야당과의 관계가 영수회담 정도에 국한되었던 과거의 방식과는 분명히 다르다.
권위에 얽매이지 않고 실질적으로 문제를 푸는 길을 택하겠다는 뜻이다. 인수위의 부처별 업무보고를 토론식 합동 보고로 바꾼 것, 인수위 인선에 다면평가를 도입한 것, 인수위 활동 뿐만 아니라 국정과제에 대한 진단을 외국 컨설팅 회사에 맡긴 것 등에서도 무엇인가 새로운 국가경영의 기준을 세워보려는 실험 정신이 묻어난다.
노 당선자가 "토론 공화국을 만들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탈권위적 토론 문화를 강조하는 것도 그의 독특한 스타일에서 비롯되고 있다. 노 당선자는 집무실에 앉아서 사람을 부르기 보다는 신계륜(申溪輪) 당선자 비서실장, 김한길 당선자 기획특보의 방을 불쑥 찾아가 현안을 논의한다.
책상에 걸터앉아 386세대 보좌진과 의견을 나누기도 한다. 최근에는 오후 6시께 퇴근하면서 비서실 직원들을 향해 "이제 퇴근합시다"라며 퇴근을 독촉하거나, 당초 오전 8시로 잡혀있던 인수위 간사단 회의에 대해 "아침 일찍 서두른다고 일이 잘 되는 것이 아니다"고 말해 회의가 오전 9시30분으로 늦춰졌다는 일화도 있다.
이러한 실험성과 파격성은 단순한 스타일상의 문제가 아니라 국정운영 방식의 변화와 연결돼 있고, 집권 5년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는 점에서 그 중요도가 한층 더해진다. 국정운영과 관련한 '노무현 스타일'의 특징은 새로운 대야(對野)·대국회(對國會) 관계의 모색, 청와대 비서실 직제 및 운영 개편, 국민의 참여가 보장되는 인사 시스템 도입 등 3개 방향에서 집약적으로 표출된다.
노 당선자의 한 관계자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면 격을 따지지 않고 누구와도 만나겠다는 것이 노 당선자의 생각"이라면서 "청와대 비서실 운영과 관련해서도 노 당선자는 비서실장을 통하기보다는 수석비서관들로부터 직접 보고를 받고 함께 토론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노 당선자의 이 같은 실험성은 단기간에 성패의 윤곽이 드러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청와대 비서실 운영 혁신 등 노 당선자가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분야는 대체로 국민이 그때 그때 성적표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노 당선자의 실용주의적·탈권위주의적 스타일이 과거에 통용되었던 방식과 심각한 충돌을 빚을지, 아니면 전반적인 사회변화를 주도할 새로운 정치문화로 자리잡을지 아직은 속단하기 어렵다.
실험성과 파격성이 인기영합이나 포퓰리즘으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다만 지금 현재로서 분명한 것은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고태성기자 tsgo@hk.co.kr
■ 盧당선자 24시
"아직 대통령이 됐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에 최대한 자유를 누려 보려고 한다."
노무현 당선자는 최근 당선 이후의 생활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런 의중을 반영, 그의 요즘 하루는 대통령 당선자로의 공식 일정과 '자연인 노무현'의 사생활이 적절히 배합돼 이뤄지고 있다.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는 노 당선자는 곧바로 당선자 비서실에서 보낸 e메일을 통해 그날의 주요언론보도와 일정을 확인한다. 집에서 보고 있는 보수와 진보 성향 신문 2개도 이 때 체크한다. 인수위 사무실에 도착하는 것은 오전 8시. 8시30분부터 30분∼1시간 동안 임채정 인수위원장 신계륜 비서실장 김한길 기획특보 이낙연(李洛淵) 대변인 이병완(李炳浣) 기획조정분과 간사로부터 일일보고를 받는다.
조찬회동을 가급적 피하고 있는 노 당선자는 보통 오전 10시께부터 공식 대외일정을 시작하고 있다. 외국 정부 주요 인사 면담 등 비중 있는 일정을 하루 2, 3개씩 소화하는 게 일반적이다.
비공식일정은 주로 오찬과 만찬을 이용한다. 고급음식점도 가끔 가지만 인수위 부근의 대중음식점을 즐겨 찾아 식사하러 온 시민들이 오히려 당황한 경우도 있었다.
노 당선자는 음식점 주인에게 사인을 해주는 등 서민적인 풍모를 과시하기도 한다. 비공식 식사 자리에선 시민단체 관계자와 지인을 만나 새 정부 운영에 대한 조언을 듣기도 하고 새 정부에 참여할 사람들을 인터뷰하기도 한다. 당선자는 이 달 초 이미 총리 후보자들에 대한 면접심사를 끝냈고 최근에는 청와대 비서진 후보들을 만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핵과 관련한 국정원 외교부 통일부 등의 민감한 정보 보고는 청와대 인근의 안가를 이용했었다.
노 당선자의 원칙 중 하나는 일요일은 쉰다는 것이다. "휴식도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한 투자"라는 신조를 고수하고 있다. 이날은 비서들도 쉬게 한다. '일요일 기자 통화 사건'도 이 때문에 벌어졌었다. 당선자는 휴일에 부인 권양숙(權良淑) 여사와 골프연습장에도 가고 경호원을 제쳐놓고 공중 사우나를 찾기도 하는 등 탈권위 행보로 시선을 모았다. 대중사우나는 평일에도 가끔 이용한다.
/고주희기자 orwell@hk.co.kr
■공직사회 분위기는
대선 이후 한달을 '기대반, 우려반'으로 보낸 정부 각 부처의 관료들은 정책의 큰 틀이 당분간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에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 모습이다.
그러나 대통령직인수위와 충돌을 빚은 것으로 보도된 부처는 복지부동 자세에 들어갔고, 다른 일부 부처도 인사의 향배에만 신경을 곤두세우는 등 여전히 새 정부의 불확실성에 대한 걱정을 떨치지 못하는 모습이다.
외교·통일부 관계자들은 노 당선자의 정책이 현 정부의 연장선상에서 추진될 것으로 보고 안도하고 있다.
그러나 외교부 일각에서는 노 당선자의 외교 스타일이 여전히 직선적인 측면이 강해 불안하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방부는 정책 보다는 군 수뇌부의 개편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분위기이다. 지난 한달 동안 군 수뇌부의 관심은 인사에 온통 모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보건복지부와 노동부 등은 인수위와의 이견으로 심적 부담이 적지않다. 복지부 관계자들은 노 당선자의 대선공약과의 괴리를 좁히는 묘안을 짜내느라 고민하고 있으며, 노동부는 인수위와 의견대립을 빚은 후 간부들의 외부 간담회 일정을 모두 취소하는 등 몸조심에 들어갔다.
경제부처 공무원들은 대체로 차기정부 정책방향에 공감하는 분위기. 하지만 업무보고 과정에서 '설익은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금융감독위원회 관계자는 인수위가 도입을 추진중인 2금융권의 '대주주 자격유지제도' 등을 거론하며 "업무보고에서 많은 개혁 정책이 논의되고 있지만 현 정부에서도 추진됐다가 법적문제 등 현실 장벽에 부딪혀 무산된 것들이 상당수"라고 지적했다.
/김진각기자 kimjg@hk.co.kr
변형섭기자 hispeed@hk.co.kr
■시민단체 반응은
시민·사회 단체는 노무현 당선자의 한달간 행보를 대체로 긍정적으로 보고 있지만 평가에 대해서는 아직 유보적이다. 청와대와 행정부의 인사가 개혁의지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될 것이라며 "좀더 지켜보자"는 입장이다.
경실련 신철영(申澈永) 사무총장은 "노 당선자가 공약을 지키려는 의지가 엿보인다"며 "인수위 구성이나 활동에서 일부 잡음이 있었지만 의사소통 시스템이 정비되면 해결될 문제"라고 전망했다.
환경운동연합 최열(崔冽) 사무총장도 "짧은 기간이었지만 당선자가 과거의 관행을 넘어 개혁의지를 관철하려 한 것 같다"며 "대미·대북 관계에서 대내외적으로 안정감을 심어주려 노력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에 비해 참여연대 김기식(金起式) 사무처장은 "구체적인 성과가 나오지 않은 만큼 총리를 비롯한 내각인선이 개혁의지를 판단하는 1차 관문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여성단체연합 이경숙(李景淑) 상임대표도 "25명의 인수위원 중 여성이 겨우 3명에 불과해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강철원기자 stro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