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1월18일 기독교 성직자 문익환이 76세로 작고했다. 문익환에게는 늦봄이라는 아름다운 호가 있었다. 그러나 그를 직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한국 사람들에게 그는 '문익환 목사'를줄인 '문목(文牧)'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하게 다가온다.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이후의 삶이 없었더라도 문목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그는 그 때 이미 평범한 목사를 넘어서 탁월한 구약학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6년 이후의 삶이 아니었다면, 그는 기독교계나 성서학계에서만 존경 받는 인물로 남았을 것이다. 유신 독재체제에 맞선 '3·1 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해 첫번째 투옥을 겪으며 문목은 민족민주운동의 광장으로 큰 걸음을 내딛었고, 그 이후 신산의 삶을 통해서 민주주의와 민족자주 운동의 헌걸찬 지도자가 되었다. 처음으로 징역살이를 했을 때, 문목은 58세였다. 그 이후의 삶을 사는 동안 그는 집이나 교회가 아니라 감옥과 거리를 거처로 삼았다. 감옥에 있나 보다 하면 그는 집회장에 나와 있었고, 집회장에 나와 있나 보다 하면 그는 감옥에 들어가 있었다. 어지간한 젊은이들도 힘겨워 할 징역살이와 거리 생활이 늦봄에게는 일상의 회로였다. 그는 느지막이 봄을 맞은, 느지막이 청춘을 되찾은 신화 속 인물 같았다.
작고하기 다섯 해 전인 1989년 문목은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그는 북한 주석 김일성과 두 차례 회담을 갖고 통일 문제 등을 논의했다. 정부의 허가 없이 이뤄진 일이었으므로, 그는 남으로 돌아온 뒤 당연히 구속되었다. 국내 정국에 공안 한풍을 몰고 온 그 일로 문목은 일부 동지들로부터도 비판받았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의 만남은 11년 뒤에 실현될 남북 첫 정상회담의 주춧돌이기도 했다.
고 종 석 /논설위원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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