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당선자는 17일 하루동안 잇따라 파격의 정치행보를 보여 여야 모두를 적잖이 놀라게 했다.그는 이날 오전 9시께 건강검진 차 입원 중인 한나라당 서청원(徐淸源) 대표에게 병실로 불쑥 휴대전화를 걸어 "노무현 입니다"라고 정중히 인사한 뒤 "한번 찾아 뵙겠다. 한나라당사나 국회 귀빈식당에서 만나고 싶다"며 회동을 제의했다.
서 대표가 건강을 이유로 회동을 20일 이후로 미루자, 노 당선자는 이날 오후 민주당 정균환(鄭均桓) 총무에게 전화를 걸어 한나라당 이규택(李揆澤) 총무와 함께 18일 3자 오찬회동을 갖자고 전격 제안했다. 대통령 당선자와 여야 총무가 3자 회동을 갖고 정국현안을 논의하는 것은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노 당선자는 또 서 대표와의 회동이 성사될 경우 한나라당측에 전달할 얘기를 이낙연(李洛淵) 대변인을 통해 미리 공개했다. '격'과 '의전'에 관한 정치권의 통념을 깨뜨린 것이다.
여야총무와의 회담에선 격의 없는 분위기에서 자유로운 의제를 놓고 토의하자는 게 당선자측 생각이다. 하지만 한나라당 이 총무는 4,000억원 대북지원, 국정원 도·감청, 공적자금 비리 의혹 등 '3대 의혹'과 특검제 및 국정조사 도입에 관한 입장을 모두 개진할 생각이다. 노 당선자도 물론 대통령직 인수위법의 조속한 통과 등 정국 현안에 대한 협조를 당부할것 같다. 결국 대통령 당선자가 야당총무와 무릎을 맞대고 협상을 하는 직접조율이 진행될 전망이다.
노 당선자의 이 같은 행보는 취임 전 야당과의 갈등을 모두 털고 출발하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됐다. 22일께 인수위법 등이 통과되지 않을 경우 20여일이 소요될 총리 인사청문회 일정 등을 감안할 때 정권 출범이 순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한나라당 측은 노 당선자측이 언급한 '검찰의 엄정한 수사' 약속 만으로는 기대치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입장이다. "대부분 검찰 수사가 종료됐거나 진행 중인 사건을 검찰이 다시 맡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주장이다. 한나라당은 특히 서 대표와의 회동은 사전 대화를 통해 노 당선자의 특검제 등 수용의사를 타진한 뒤 결정한다는 방침이다. 박종희(朴鍾熙) 대변인이 "비중 있는 정치적 만남에는 전제 조건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각에선 재검표 문제가 한나라당측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여야 총무-서 대표와의 잇따른 회담을 통해 이른바 의혹사건 진상규명 등에 대한 합의가 도출될 경우 여야 관계가 새 국면을 맞는 전기가 될 수도 있다. 한나라당측도 의혹사건들과 인수위법 등을 연계하는 데 부담을 느끼고 있다. 이런 양측의 내부 기류가 여야 타협의 여지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특검제 등의 수용에 대한 민주당내 동교동계를 비롯한 구주류의 반발도 노 당선자의 파격적이고 신속한 움직임을 쫓아가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유성식기자 ssyoo@hk.co.kr
안준현기자 dejav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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