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래(조리)? …, 500년은 됐을 끼다." 마을 조리농사가 언제부터 시작됐냐는 우문(愚問)에 진주댁 정인남(74) 할머니의 명료한 대답. 하지만 고개 끄덕일 새도 없이 반론이 이어진다. " 아이다. 내 시집올 때 우리 씨이미(시어머니)도 500년도 넘었다 쿠던데. 하모 한 600년은 될 끼다." 그러자 매사 논리를 앞세우는 영주댁 윤둘이(72) 할머니가 "택(턱)도 없는 소리"라며 대화를 분지른다. "그라모, 오백년 전에는 조래 없이 우찌 쌀 일어서 밥 해묻다 카더노? 몬해도(못해도) 1,000년은 될 끼구마." 뜨겁던 논쟁은 부녀회장 신금숙(58)씨가 찐 고구마를 들고 나타나면서 중동무이. "동치미 한 사발 퍼온나. 국물 업시 곰메(고구마)를 우찌 넘기노?" "아따, 할매는 그리 마이 묵고 저녁밥은 우짤라꼬?" 그득하던 고구마 소쿠리가 빌 즈음, 주민들도 한나절 만든 조리를 챙겨 일어선다. 산 마을 짧은 해는 이미 옥녀봉 너머로 돌아 선 뒤였다.(복)조리 짓는 마을로,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근동보다 도회지에서 더 유명하다는 경남 산청군 시천면 동당마을. 경상도쪽에서 지리산이 시작하는 계곡, 중산리와 맞닿아 천왕봉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다는 마을이다. 험한 산세에 골짜기를 내닫는 물길이 얼마나 급했으면 동네 이름을 '시천(矢川)'이라고 했을까.
그 험한 곳에 비집고 앉았으니 마을 살림은 또 오죽할까. 동당마을 43가구 어느 집이나 추곡수매는 커녕, 산청 장날 반찬거리 바꿔 먹을 쌀 한 됫박 이고 나갈 여유도 없다고 했다. "시집 장가간 자석들(자식들) 한 섬씩 부쳐주고 나모 노인네 일년 땟거리도 달롱달롱 항께, 말 다했지 뭐." 조리농사는 그래서 겨울 소일거리 이상의 의미였고, 주민들은 대대로, 끝내 결론을 못 낸 그 먼 옛적부터, 죽기살기로 산죽과 씨름을 해야 했다.
18살에 이 곳 '악깡촌'으로 시집 와 50년 넘게 조리를 만들었다는 영주댁 할머니는 "조래농사로 자석들 연필 사줘감서 핵교 보냈고, 손주들 과자값도 준다"며 흐뭇하게 웃었다.
조리농사는 추수가 끝나는 10월 말부터 시작된다. 지게 지고 뒷산을 누비며 산죽을 찌는(베는) 일이다. "산죽도 아무 끼나 다 되는 기 아이고, 가지 뻗기 전 그 해에 난 어린 놈이라야 낭창낭창함서 억세지도 않고, 잘 뿔라지지도(부러지지도) 않거등." 쪄 온 산죽은 연살 만들 듯 4등분으로 쪼개 하루 이틀 양달에 말렸다가, 까끌까끌한 겉 껍질을 털어내고 물에 3∼4시간씩 담가둬야 한다.
"물을 안 믹이모(먹이면) 손가락을 찔러 사서 일을 몬한다." 건져 낸 산죽의 물이 빠지면 그 때부터 조리 엮는 작업이다. 땔감 아끼느라 작업은 대개 공동작업이었고, 아들 딸 자랑 끝에 '조리 사돈'을 맺기도 했다. 경기 좋았던 70, 80년대에는 '새로 1시(새벽 1시)'까지도 예사였다고 했다.
"조리 한 질(50개)에 3,000원씩 주던 80년대 초만 해도 한 집서 100만원 돈은 쉽게 맹글었구마. 논 한 마지기 15만∼20만원 했을 땐께 1년 조리농사로 논 다섯마지기가 생기는 택이지. 누가 안하것노." 마을 이장 박경제씨는 그 때는 앉을 힘만 있으면 누구나 조리와 씨름을 했다고 했다. '없어서 못 팔던' 70년대에는 도매상들이 현찰 들고 마을에 들어와 진을 쳤고, 복조리 팔아 학비하려던 고학생들도 심심찮게 마을을 찾았다. 정초에 식구 수대로 조리를 사둬야 한 해 쌀·보리 일어 밥을 해먹을 수 있었고, 플라스틱 조리가 나오고, 석발기가 나와 조리가 쓸모없게 된 한참 뒤까지, 오색실 묶어 복조리로 대들보에 걸었을 것이다.
강로댁 권경숙(62)씨는 "와, 지난 추석에 세상 베린(돌아가신·당시 98세) 근농댁 할매 안 있소. 그 할매도 시집와서 조리 못 맨든다꼬 시이미한테 부지깽이로 맞아서 머리가 깨졌다 안 쿠데요"하며 이장의 말을 거들었다. 조리에 얽힌 시집살이 이야기부터, 새벽 밥 해먹고 지게에 조리 얹어 하동 5일장 갔다 오던 이야기까지 대화는 끝이 없다. "그 어른이 갈티재, 고싶지재 넘어 하동장 100리 길을 갔다가 소금을 바꿔 오는데, 막걸리는 한 잔 했제, 날은 벌씨 저물었제,…." 산길서 헛것(귀신)이나 여시(여우) 만났다던 시아버지 얘기다. 이 즈음이면 설잠 자다가도 귀신같이 깨어 눈을 뙤록거렸을 아이들은 이제 마을에 남아있지 않았다.
올해 동당마을 조리 값은 도매로 하나에 400원(소매 600원). 한 질에 2만원이지만 일 손도 없는 데다 찾는 이도 적어, 가구당 많아야 50질(약 100만원) 정도 밖에 못한다.
이장 박씨는 "부녀회나 복지회 같은 데서 조리 팔아 기금 만든다고 두어 질 씩 주문을 한다"고 했다. 또 최근 들어 주유소나 보험회사 같은 곳에서도 복조리를 찾지만, 하루가 다르게 중국산 베트남산 물량이 늘어나 동당마을 토종 복조리가 설 땅을 잃고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미국 L.A나 캐나다 네덜란드 등 외국 교민들이 복조리를 주문하는 경우가 가끔 있어서 반갑다고 했다.
그는 "수 십년간 우리 물건 떼 가서 팔아 묵던 부산 자갈치 오복시장에 가봐도 베트남 물건들이 놓여 있다"며 "그래도 그거는 눈만 흘기도 쪼개져 삐는 기 조래도 아이라" 며 언성을 높였다. "그것들이 뭘 몰라서 그란다. 쌀 이는 것도 아니고, 복 일라꼬 걸어두는 기 복조린데 우리 복조리를 걸어야지, 참" 강로댁도 진주댁도 영주댁도, 마을에서는 새댁 축에 끼인다는 법산댁 김순덕(61) 씨도 이 대목에서는 한 마음으로 혀를 찼다.
그래도 대세가 기우니 동당마을 겨울 농사의 무게중심도 조리에서 곶감 쪽으로 넘어가는 추세다. 땡감 사서 깎아 말렸다가 내다 팔면 한 접에 4만∼5만원은 남길 수 있고, 부지런을 떨면 한 집서 5동(500접)까지 깎는다니 소득으로 치면 조리농사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래도 마을 어른들은 조리 짓는 집이 하나 둘 줄어드는 게 못내 아쉽고 안타깝다. "조래 농사야 밑천 없어도 하고, 동네서 모도 모여 이야기 해감서 할 수 있지만서도 곶감은 따로따로 지(자기) 집서 한다." "그라이(그러니) 겨울 내내 얼굴 한 번 못보고 넘어간다는 말이 헛말이 아이라." 몇 해 전부터는 녹차농사 바람이 불어 남새 일궈 찬거리하던 텃밭을 차밭으로 개간하는 집도 늘고 있다. "돈 나올 디가 없잉께 뭘 해도 하긴 해야 되는데…"
주민들의 조리농사 기원 논쟁이 뜨거웠던 것도 조리농사의 맥이 끊길 날이 얼마 안 남았음을 알기 때문일까. 그래서 더 아쉽고, 애착이 가는 지도 모른다. "우리 죽고 나면 손가락이 발가락보다 몬하게 갈라터져 감서 누가 이 짓을 하겄노. 도회지 나간 자석들은 벌써부터 그만 두라꼬 보통 성화가 아이다." 전해오는 얘기로 천상의 옥녀(옥녀봉)가 거문고 타는 형국이라는 동당마을. 떠나는 길, 멀찍이서 돌아다 본 마을은 할머니들의 조리 짓는 모습을 닮아 있었다.
/산청=글 최윤필기자walden@hk.co.kr
사진 이성덕기자
■쌀 일듯 복을… 새해 첫 새벽 복조리 내걸어
새해 첫 새벽 대들보나 부엌문 앞에 복조리 거는 풍속은 40, 50대만 돼도 낯설지 않다. 쌀을 일 듯 복을 인다는 상징성과, 조리의 무수한 눈이 나쁜 기운을 감시한다는 벽사(癖似), 돌을 골라내 오복(五福)의 하나인 치아를 보호한다는 실용적 의미 등이 녹아 있다고 한다.
그래서 복조리는 값도 안 깎았고, 아무 집 마당에나 던져두고 나중에 조리 값을 받으러 가도 싫은 소리를 듣는 예가 드물었다. 쌀이 천대받으면서 복조리 풍속도 점차 사라지는 추세. 그나마 중국산 베트남산이 시장의 80∼90%를 잠식하고 있는 실정이다. 조리유통 전문업체인 (주)대사랑 김의선 사장은 "한 해 국산 수요가 약 30만개, 수입산이 250만∼300만개에 이른다"고 말했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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