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 사태가 북미 양자간 협상이 아니라 다자(多者) 해결 방향으로 점점 쏠리고 있다. 화두는 물론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과감한 구상'이고, 여기에 일본 러시아 등 주변국이 동조하면서 다자 협상론이 급속히 부각했다. 1990년대 초반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를 주도했다가 중도 하차한 '4자 회담' 방식의 협상 틀이 북한 핵 문제의 해법으로 재등장하는 셈이다.다자의 구성은 아직 구체화하진 않았으나, 미국은 남북과 중국 러시아 일본이 참여하는 6자, 일본은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에 남한과 일본이 끼는 'P5+2'구도를 상정하고 있는 듯하다. 최성홍(崔成泓) 외교부 장관과 가와구치 요리코(川口順子) 일본 외상도 15일 회담에서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다자 협상 방식을 내놓은 것은 물론 북미 양자 회담인 1994년 제네바 합의가 실패했다는 자책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다자 협상은 또 미국에 이라크 전쟁에 전념할 명분을 줄 뿐더러, 미국이 제안한 '새로운 협상'이 실패하더라도 손실을 분산하는 효과가 있다. 러시아 등도 이 틀을 통해 한반도 문제에 대한 발언권을 높이는 등 외교·경제적 실리를 노리고 있다.
대북 체제보장, 핵 투명성 검증, 비용 부담 등 북한 핵 문제의 핵심 사안들도 다자의 틀 속에서 두루 논의되고 있다. 우선 미국은 북한의 핵 폐기에 대응해 대통령 친서로 '소극적 안전보장'(NSA)을 해준 뒤 주변국들이 이를 보증하는 방법을 염두에 두고 있다. 또 반대급부로 관련국들이 화력발전소, 천연가스 등 대체에너지를 북한에 지원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측은 이미 7억 달러 상당을 투입한 경수로 사업을 중단해야 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4자 회담이 참석국의 첨예한 이해관계만 노정한 채 실패했듯이,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다자 협상의 전도도 밝지는 않다. 무엇보다 협상 상대인 북한이 반발할 공산이 크다. 북한은 "핵 문제는 미국의 적대시 정책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북미간 사안"이라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오히려 북한은 미국과의 담판 구도로 재편하기 위해 핵 재처리시설 가동 등 초강수를 연발할 수 있다.
다자 협상이 우리 정부의 운신의 폭을 좁힐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다자협의체의 구성원으로 전락해 북한 핵 문제의 '주도적 역할'이 무색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부 당국자는 16일 "북한 핵 문제가 유엔 안보리 등 다자의 틀로 넘어가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면서 "최악의 경우 우리가 원치 않는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동준기자 d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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