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행사의 꼴불견은 이름표를 단 사람들이 숨을 죽인 채 머리를 조아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참석자가 적은 회의나 서로 다 아는 사람들이면 그럴 필요가 없을 텐데 제대로 읽어 주지도 않을 이름표를 굳이 달게 하는 이유를 알기 어렵다. 대통령의 말씀이 땅바닥에 떨어질세라 코를 박고 받아 적는 모습은 더욱 볼썽 사납다. 말을 해야 할 시간에 받아쓰기를 하는, 일방적인 교시의 자리에서 독창적인 제안과 건설적인 반대가 나오기는 어렵다.자신의 말을 일일이 받아 적는 게 부담스러울 텐데도 우리 대통령들은 말씀을 참 잘도 많이 하셨다. 식사속도가 빠른 전두환 전 대통령때는 말씀을 들으며 식사를 하는 불공죄(不恭罪)를 저지를까 봐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하거나 미리 요기를 하고 청와대에 갔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야당 총재시절 청와대에 들어갈 때 이름표 달기를 거부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런 김 전대통령도 말수는 적지 않았다. 그 말이 대부분 자기의 말이 아니라 말씀자료를 읽는 수준이어서 우스웠던 것이다. 진짜 대통령의 말은 "칼국수에 밥 말아 드시면 맛있습니다"밖에 없더라고 이야기한 사람도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토론공화국을 만들겠다고 말했으니 앞으로 꼴불견행태는 사라지게 되는 것일까. 노 당선자는 새 정부에서 가장 활성화해야 할 과제가 토론이며 토론을 국정운영방법으로 정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해양수산부장관 시절에 모든 국장을 불러 모아 토론을 통해 정책을 결정했던 그의 토론예찬은 임직원들과 솔직하고 친밀한 대화를 나누어 성공한 잭 웰치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같다. 새 정부가 지향하는 리눅스식 정책개발 방식의 핵심도 토론이다. 전세계 500만이 넘는 프로그램 개발자들이 참여해 만든 컴퓨터 운용체계 리눅스처럼 정책의 소스 코드(핵심 취지)를 공개하고 정책소비자들이 자발적으로 정책시안의 버그(결함)를 수정·보완한다는 개념이다.
토론은 리더십과도 관계가 있다. 지금까지 대통령들의 리더십은 카리스마적이고 제왕적이고 피라미드형이었다. 원탁은 놓였지만 앉는 자리는 물론 발언순서에 분명한 서열이 있었다. 민주적 리더십은 단기간의 테크닉 습득과 제스처를 통해 발휘되는 게 아니라 장기간 학습된 민주적 태도를 통해 드러난다. 요즘 네트워크형·디지털형 리더십이 이야기되고 있지만,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한 민주적 리더십은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토론이 필요하며 토론과정에서 새로운 리더십이 형성되고 발현된다. 토론을 하다 보면 자연히 다툼이 생기고 시간이 더 걸리는데, 민주주의란 원래 시끄럽고 일사불란하지 않으며 '비능률적'인 것이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가 달라지면 사회 전반의 의사결정방식과 각급 학교의 수업방식도 바뀔 수 있을 것이다. 폭력적이고 배타적인 토론풍토도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공동결정 공동책임이라는 대목이다. 토론으로 결정한 정책의 결과는 참여자 모두의 책임이다. 여론수렴방식을 디지털화하면 국민은 정책소비자에서 개발자로 위치가 달라진다. 그러면 정부와 국민이 토론 끝에 결정한 정책은 국민 책임이 되는 것인가. 국민도 책임이 있으므로 아무 말도 못하게 되는 것인가. 토론에 참여하지 않는 비판자들은 네덜란드 속담처럼 '잠자코 있는 사람은 찬성자다'라고 생각해도 되는 것인가. 예산타령을 하지 말라고 정부부처를 질타한 노 당선자에 대해 조순형 의원이 "토론공화국을 만들겠다면서 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대통령으로서 집무를 하다 보면 사사건건 토론을 하는 일이 성가시고 듣기 싫은 말이 귀에 거슬리게 될지 모르는데 토론 자체가 장식품이 되는 일은 없을까. '보통사람의 시대'를 내세운 노태우 전대통령이 민주적 리더십을 강조하며 몸소 가방을 들고 다니다가 슬그머니 그만두고 축재에 관한 한 보통사람이 아님을 보여준 사례가 있었다. 변화를 기대하면서 이런 저런 걱정을 덧붙여 두고 싶다.
임 철 순 논설위원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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