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자라 고루하고 진부하다고요? 200년 전 사람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오히려 지금 우리보다 앞서 있어요." EBS의 '한국인물사 연속특강' 시리즈 강의 가운데 '개혁가, 다산 정약용'(월∼목 밤 10시)를 맡은 박석무(60) 다산 학술 문화재단 이사는 지난달 30일 다산의 진보성을 화두로 내세워 첫 강의에 들어갔다.'한국인물사'는 지난달 2일 시작해 1월23일까지 단군에서 백범 김구에 이르는 주요 인물로 한국사의 맥을 짚고 있다. 이이화, 최완수, 신용하 등 강사진도 화려하다. 박 이사의 강의는 애초 9일로 끝날 예정이었으나 시청자들의 호응으로 16일까지로 연장됐다.
투박하면서도 열정적인 강의 모습, 시사적 주제와 맞물린 다산 재해석 등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13·14대 국회의원을 지낸 그는 정치인 시절부터 다산 전문가로 이름을 날렸다.
다산의 무엇이 '앞서 있다'는 것일까. 그는 14일 '탕론'(湯論)을 강의하며 다산의 '못된 군왕을 백성이 쫓아낼 수 있다는 상향식 정치관의 진보성'을 역설했다. "가령 '기예론'(技藝論)에서 기술개발을 강조한 대목이나, 경기북부 지역 암행어사를 하며 어의 강명길과 왕실 지관 김양직 등 임금의 최측근에게 우선 엄하게 법을 적용하라(用法 宜自近習始)고 복명소를 올린 것들은 지금 이 시대에 들어맞는 얘기 아닌가요."
다산에 대한 관심은 그의 평생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전남대 법학과) 시절 '사상계' 등을 통해 다산의 '사회적 약자를 도우려는 논리 전개'에 빠져 들었다. 법대 대학원 시절 법제사를 전공하며 다산의 법사상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유신 반대 등으로 시국사범이 되고 '신원 특이자'가 되면서 교수의 길은 끊기고 말았지만 중·고교에서 영어교사로 지내면서 다산학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18년간 유배지에서 학문을 성숙시킨 다산처럼 그의 다산학 공부도 감옥 안에서 영글었다. 수배 기간과 두 차례의 수감 기간에 그는 다산의 글을 번역해 '다산 산문선'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다산 기행', 다산의 시를 엮은 '애절양'(哀絶陽) 등을 펴냈다. "감옥에 갇혀 있지 않았다면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할 수 없었을 겁니다."
박 이사는 "TV가 다산의 생각을 널리 알릴 수 있는 매체"라며 다산학의 대중화 필요성을 역설했다. "다산 스스로도 이렇게 널리 자신의 생각이 알려지길 바랄 겁니다. 다산의 실체를 알려주기 위해 주자학과의 차이 등 구체적 사례를 들어 다산을 알리려 애썼습니다. 가르치는 기술이 없어 고생은 했습니다만…."
다산학의 실천성 외에도 그는 '큰 문장가'로서의 다산을 이야기하느라 분필을 닳아 없앴다. "시 '애절양'은 자신이 매우 아껴서 '목민심서'에도 인용했지요. 과중한 세금, 관리들의 탄압을 너무도 생생히 묘사했어요. 아들을 낳을수록 세금을 많이 매기니 그에 견디다 못해 자신의 양(陽·생식기)을 자른다는 거지요."
다산의 학문과 인간성을 함께 보여주며 그는 강의를 마무리하겠다고 말했다. "부패와 불평등에 대해서는 매몰차고 호된 사상가였지만 한편으로는 따뜻하고 훈훈한 인간미를 갖춘 사람이었어요.
500권의 저서를 남겼다는 건 정말 엄청난 겁니다. 백성에 대한 애정이 한도 끝도 없었고, 탄압받는 백성을 옹호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게지요."
/이종도기자 ec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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