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로 자란 영웅은 자신의 부모를 죽인 원수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한 발, 두 발 원수에게 다가선 후 드디어 일합을 겨루게 되는데…. 전통 중국 무협 영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러나 장이모(張藝謨) 감독의 '영웅(英雄)'은 전통적 무협극의 결말 즈음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중국 전국시대의 진나라. 왕 영정(懶政·시황제)은 그간 자신을 노렸던 자객 장천(견자단), 파검(량차오웨이), 비설(장만위)을 격파했다며 그들로부터 빼앗은 무기를 들고 온 지방관리 무명(리롄제)을 맞아 들인다.
누구도 100보 거리 안으로 들어온 적이 없으나 왕은 무명의 공을 치하, 10보 앞으로 불러 들인다. 무명이 적을 어떻게 무찔렀는가를 설명하고, 얘기를 들은 왕이 되받아 치는 식으로 이야기는 흘러간다.
무명이 전달하는 이야기는 붉은 색이다. '장천과의 싸움에서는 우중에 2시간을 서로 노려 보다가(심안무· 心眼武) 일합으로 결판을 냈고 오랜 연인 비설과 파검을 이간질해 결국 비설이 파검을 죽이도록 한 뒤, 비설을 죽이는 전략으로 싸움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무예의 달인조차 감정의 노예라는 요지의 얘기가 붉은 화면에 펼쳐진다.
이에 왕은 매우 이성적인 분석을 내놓는다. '무예의 격이 높은 장천이 무명에게 패배한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장천은 무명에게 필살기 '10보 필살 검법'을 펼칠 기회를 주기 위해 일부러 져 주었고, 왕을 죽이려다 스스로 포기한 파검과 끝까지 암살을 주장하는 비설을 무명이 격파, 결국 왕의 코 앞에 오게 된 것이 아니냐"는 것. 대의를 위한 영웅들의 희생담은 푸른 화면에 펼쳐진다.
허를 찔린 무명은 다시 진실을 이야기한다. 이제 이야기는 초록빛으로 진술되는데 무명이 왜 황제에게 원한을 갖게 되었는지, 암살 사건이 어떻게 모의됐는지 그리고 병사는 100보 뒤에 있어 충분히 왕을 죽일 수 있는 거리인데도 왜 그는 차마 왕을 죽이지 못하고 있는지가 설명된다. 파검과 비설의 지극한 사랑은 흰 색 화면에, 이런 이야기가 진술되는 왕궁은 검은 화면으로 표현된다.
현란한 색채 대비는 이 영화가 그저 원수를 갚는 무협극의 전통을 따르고 있지 않음을 증명한다. '영웅'은 숨은 진실을 찾아가는 영화이지만 동시에 중국 무협이 화자에 따라 수없이 변주되는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최초의 영화이기도 하다.
장이모의 무협 영화는 일본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후기작을 방불케 하는 색과 구도에 대한 집착이 특징이다. 그는 물 위를 걷는 무술인 수상비(水上飛) 장면에서 중국 무협의 전통인 와이어 액션(몸에 투명한 줄을 매고 하늘을 나는 식의 과장된 액션)을 무용과도 같은 예술적 화면으로 잡아내는 방식으로 리안 감독이 '와호장룡'에서 보인 대나무 대결 장면에 견줄 만한 아름다운 화면을 만들어냈다.
두 자객이 암살을 포기하는 이유가 천하통일이라는 대의명분 때문이라는 발상이 '전체주의적'이라는 비난도 적잖지만 지난달 20일 중국에서 개봉 첫날에 1,200만위엔(약 18억원)을 벌어들이며 사상 최고의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폼' 잡는 것에 비해 정작 영웅담은 적은 영화지만 중국 무협의 또 다른 기준이 될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24일 개봉. 12세 관람가.
/박은주기자 ju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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