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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모호함, 그 존재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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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모호함, 그 존재의 이유

입력
2003.0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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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를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처음부터 신은 선신과 악신으로 나뉘어 있고, 그 둘이 끊임없는 투쟁을 하다가, 결국 선신이 악신을 물리치고 승리함으로써 세상이 생기고 삶이 비롯했다는 주장을 하는 종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 종교에서는 옳고 그름이 뚜렷하고 승자와 패자가 분명합니다. 부정해야 할 대상이 있고 지지해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택일은 당연한 윤리적 규범입니다.그런데 절대적이고 유일한 신이 세상과 사람을 선하고 완전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종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종교는 대체로 악의 존재를 설명하는 논리가 모호합니다. 신은 완전하고 선한 분인데 왜 악이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설명이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까닭은 알 수 없지만 겸허하게 신을 신뢰하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이 마지막 대답입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일이 있습니다. '분명한' 종교들은 오래 지탱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모호한' 종교들은 여전히 지속하고 있습니다.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흔히 분명한 것은 마땅히 좋은 것이고 모호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라고 여기는데 결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과연 분명함은 옳고 모호함은 그른 것인가 하는 물음을 갖게 합니다. 어쩌면 '분명함이 지닌 그늘'과 '모호함이 지닌 빛'의 측면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하게 한다고 해도 좋을 듯 합니다.

그런데 삶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자리에서 보니까 그렇다 할지 몰라도 만약 누가 칼로 자르듯 분명한 것이 삶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보다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삶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삶이 모호하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미로를 헤매는 것 같아도, 출구를 기대할 수 없을 만큼 몽롱하기만 한 것이 삶은 아닙니다. 오히려 모호함은 분명함보다 더 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호함은 분명함이 재단하여 잘라낸 부분마저 자기 삶으로 안고 씨름하기 때문입니다. 모호함은 비록 불분명할지라도 삶 자체를 배신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이 계기에서 문득 산문과 시를 유념하게 됩니다. 우리는 산문의 명료한 어휘와 일관하는 논리의 정연성을 신뢰합니다. 그래서 삶을 산문적 논리의 틀로 재단하고 모든 문제를 그 틀로 풀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 개념과 논리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정해야 하고 제거해야 할 대상이 필연적으로 '생산'됩니다. 개념과 논리가 삶을 모두 아우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른바 '산문적 자아'는 '타'를 부정함으로써 비로소 긍정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실은 삶을 총체적으로 수용하지 못하는 옹졸함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는 다릅니다. 오든(W. H. Auden)의 말을 빌린다면 '시는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저 가능성을 향한 길을 열어줍니다.' 시는 분명함의 단순성을 의도적으로 파괴합니다. 그러나 그 파괴는 언제나 '예상하지 않았던 사물의 출현, 또는 새 누리의 탄생'과 이어집니다. 제거해야 할 대상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의 출현 앞에서 이제까지의 자아가 스스로 '새로운 존재'이기를 바라는 '산고(産苦)하는 주체'들이 됩니다.

그렇다면 결국 분명한 종교들이 소멸한 까닭은 '시를 부정한 산문의 횡포'때문이고, 모호한 종교들이 지속하는 까닭은 '산문의 논리에 함몰되지 않은 시의 자존(自尊)' 때문이라고 해도 좋을 듯 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산문'이 시를 경청하기를, 아니, 오늘 우리 시대의 '시'가 제발 자존(自存)하기를, 새해를 맞아 기원합니다.

정 진 홍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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