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냐"고 묻자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독수리 오형제'라고 말한다. 수없이 같은 질문을 받았지만 그때마다 장준환(33) 감독은 별 뾰족한 답을 찾지 못했다. 상상력, 그것도 어이없을 만큼 엉뚱한 생각을 말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범 우주적 코믹 납치극"이라고 덧붙였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황당한지 얼굴을 붉힌다.지금까지 "지구를 지켜라"라고 외친 자는 수 없이 많았다. 그가 입에 담은 독수리 오형제를 비롯해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등. 그들은 모두 초능력의 소유자들이다. 그러나 장준환 감독의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의 주인공 병구(신하균)는 오형제도 아니고, 그가 어릴 때 즐겨 본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짱가나 마징가Z도 아니다. 대한민국에 천애고아나 다름없이 사는 외롭고 가난한 청년이다. 그가 어느날 평범한 중년 가장인 강만식(백윤식)을 안드로메다에서 온 왕자라고 확신하고 납치를 시도한다. 더구나 외계인을 잡는 무기는 물파스와 때밀이 수건이다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공상을 할까.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지금 내 부모는 진짜가 아니야. 나는 분명 다른 존재일 것이다' 하는 식으로. 형이 일찍 서울로 공부하러 가 고향(전주)에서 혼자 있으면서 외롭고 괴로워 도피처를 찾고 싶었는지 모른다. 병구도 비슷하다. 가난과 폭력과 불행으로부터 도피해 다른 곳에 에너지를 쏟아 현실을 이겨내려는 것이다. 그래서 외계인의 존재를 주장하고, 그를 없애 지구를 지키면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미친 놈이다."
맞다. 누가 봐도 미친 놈이고, 헛소리 같은 이야기다. 그럴듯한 상황 설정과 완벽한 특수 효과로 우리를 잠시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할리우드 SF도 아니고. 한국영화로는 불가능한 도전이다. 그럴 생각도 없었다. 장 감독은 애초 판타지에서만 놀 생각이 아니었다. "희한한 상상력이 이야기에 녹아 들어,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페이소스가 되도록 했다. 미친 놈이 늘 그렇듯 아주 진지한 병구를 통해 웃음도 연출하지만 지구 역사나 우리 사회 문제를 짚어간다."
낯선 것을 싫어하는 이 땅에서 엉뚱한 상상력은 다치기 쉽다. 한발 앞서 간 김용태의 '미지왕'(1996년)이 그랬고, 지금은 관객이 즐겁게 받아들이지만 장진의 데뷔작 '기막힌 사내들'(1997년)도 그랬다. 장준환 감독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어쩌랴. 상상력이란 타고난 것이어서 쉽게 버려지지 않는다. "세련이 주는 재미도 있지만 황당한 재미, 엉성한 맛이란 것도 있다. 문제는 캐릭터와 이야기의 밀도"라고 했다. 방법은 뒤섞기. 현실과 상상을 뒤섞고, 공포 스릴러 멜로 코미디 판타지를 뒤섞고, '블레이드 러너' '유주얼 서스펙트' '2002스페이스 오딧세이' 등 20여 작품을 곳곳에서 패러디했다.
또 하나는 리듬. 많은 컷(Cut)으로 인물의 격렬한 감정 변화와 심리 상태를 드러내려 했다. 잘못되면 그의 말처럼 '오바(Over)'로 보일 수 있다. "황당하고 키치적인 것을 굳이 피하지 않았다. 문제는 영화 전체, 장면 장면에서 그것들이 얼마나 리드미컬하게 넘어 가는가다. 이 영화의 최대 과제이기도 하다." 무엇을 말하기 위해 위험하고 괴상한 영화를 데뷔작으로 선택했을까. 그의 대답이 걸작이다. "병구 같은 불행한 인물을 만들면 지구가 위험해 진다."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 장준환 감독 자신이 혹시 외계인은 아닐까.
강원 태백과 부산에서 촬영을 끝내고 후반작업을 하고 있는 '지구를 지켜라'는 3월 개봉한다.
/이대현기자 leedh@hk.co.kr
● 장준환 감독
무엇인가 만들어 보여주고 나누는 것이 좋아 고교 때까지 그림을 그렸다. 미대에 가려 했지만 부모님이 "밥 굶는다"고 반대해 포기했는데 엉뚱하게 대학(성균관대 영문과) 4학년 때 영화서클에 들어가면서 "진짜 굶어 죽기 십상"인 감독이 됐다고 한다.
내친김에 한국영화아카데미까지 졸업했고 '모텔 선인장' 연출부 생활을 거쳐, '유령'의 시나리오까지 썼다. 유일한 그의 단편 '2001 이매진'(1995년) 역시 자신이 존 레논의 환생이라고 믿는 과대망상, 피해망상자가 현실에서 겪는 비극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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