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들은 1972년 10월 유신 이후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미국 내의 비판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광범위한 로비를 시도했음을 알려준다. 특히 박정희 정권은 '7·4 남북 공동성명' 채택을 두고 북한이 자신들의 통일원칙을 남한 당국이 수용한 것으로 평가한데다, 미국 역시 북한을 주권국가로 인정하고 군사원조 규모를 축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한미 관계에 상당한 부담을 느꼈던 것으로 나타났다.■7·4 후 대미 외교
외교부가 공개한 '남북공동성명 발표 이후 대미외교의 문제점과 대책' 보고서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군사원조 지속에 대해 상당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보고서는 "로저스 미 국무장관이 북한의 공식 영문국호인 'DPRK'를 인정하는 등 북한에 대한 정치적 접근의 실마리를 찾으려 하고 있다"며 "미국은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도모함으로써 '닉슨 독트린'의 실천을 용이케 하고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할 것으로 판단된다"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보고서는 고위 사절단의 미국 파견을 비롯, 한미 양국의 정계·학계·언론계·경제계의 활발한 교류 언론계 접촉 강화 재미교포 선도 강화 미국 의회 내 진보파 의원들에 대한 활발한 접근 주미 공관 역량 강화 등의 외교적 조치를 해법으로 제시했다.
■7·4 후 북한 태도
'남북 공동성명 발표 이후 대미외교의 문제점과 대책'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은 '7·4 남북 공동성명' 채택으로 남측이 자신들의 통일원칙을 수용했다고 평가하면서 남북문제에 대한 유엔의 간섭 배제를 추진했다.
보고서 중 '주(駐) 양곤(현 미얀마의 수도) 한국 총영사의 박인근 북한 총영사와의 대화내용'에 따르면 당시 박 총영사는 "남북공동성명은 우리의 통일원칙을 남조선에서 수락한 것"이라며 "'외세개입 반대'에 합의한 이상 미군 철수와 UNCURK(유엔재건위원회) 해체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한국 총영사가 "북한의 재침략 준비가 (공동성명 채택과 같은) 기회를 가로막아 왔다"고 반박하자 박 총영사는 "7·4 성명 전에도 당신네(한국)들과 접촉할 용의가 있었는데 다만 당신네측에서 접촉을 꺼려했을 뿐"이라고 재반박했다.
■10월 유신 미·일 반응
'10·17 특별성명(10월 유신) 관련 각국 주요 동향' 보고서는 "일본은 염려가 없으나 미국은 잘 설득해야 한다"고 기술, 10월 유신에 대해 미국은 '깊은 우려'를 표시한 반면 일본은 '이해한다'는 입장이었음을 보여준다.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다나카 일본 총리는 정일권(丁一權) 특사와의 면담에서 10월 유신에 대해 "조금 심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나 (한국 정부가) 남북대화를 계속 진전시키는 데 필요한 일이라고 하니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보고서는 "미국 국무부 고위 관료들이 10월 유신 하루 전인 10월16일 한국의 새로운 사태가 닉슨 행정부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 수 있음을 우려했다"고 전했다. 특히 레너드 미 국무부 한국과장은 주미 한국대사관 관계자에게 "사태 진전에 따라 하비브 주한 대사를 본국에 불러야 할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10월 유신 후 대미 로비
박정희 정권은 10월 유신 이후 다양한 경로를 통해 대미 로비활동에 나섰으며 3만 달러에 달하는 특별예산까지 편성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10·17 특별성명과 관련한 대미특별 활동 계획'과 '일반 홍보활동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정부는 미국 내 비판 여론을 의식, 주미 대사를 통한 친한파 의원 접촉, 로비스트를 활용한 언론 홍보 활동 등을 적극 추진했다.
정부는 보고서에서 당시 미국의 태도와 관련, "국군 현대화 계획에 차질이 우려되며 주한미군의 조기 철수 가능성도 있다"는 분석을 내놓으며 "미 정계·언론계의 비판적 언동을 방지하고 이번 조치를 취하게 된 특수성을 설득할 필요성이 있다"고 기술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주미 대사에게 로저스 미 국무장관과 알렉시스 존슨 국무차관, 마샬 그린 차관보 등을 만나도록 지시하는 한편 미국 내 저명한 칼럼니스트를 활용해 73년 3월까지 매달 1차례씩 6차례 칼럼을 게재하기 위해 1차례에 5,000달러씩 3만 달러의 특별예산을 편성했다. 또 미국 주요 일간지 독자투고란에 유신 홍보글을 수시로 투고하도록 지시했다.
/양정대기자 torc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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