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륜산(崑崙山)이 서방의 낙원을 대표한다면 삼신산(三神山)은 동방의 가장 유명한 낙원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서쪽으로 고비사막 너머 멀리에 축복받은 땅이 있다고 생각하는 한편 동쪽으로 바다 멀리 어딘가에도 이상향이 존재한다고 상상했다. 대륙의 동쪽, 정확히는 동북쪽에 있는 바다는 발해(渤海)이다. 이 발해의 동쪽으로 몇 억만리인지 모를 먼 곳에 거대한 물의 계곡이 있는데 그 이름을 귀허(歸墟)라고 하였다. 귀허는 바닥이 없는 바다의 심연(深淵)으로 지상의 온갖 강물과 심지어 천상의 은하수까지 흘러드는 곳이지만 수심에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고 하니 이곳이 얼마나 엄청난 물의 저장소인지 알 수 있다. 실로 이곳은 세상의 모든 물의 고향과 같은 곳이었다.이 귀허에는 다섯 개의 아름다운 섬이 떠 있었다. 그 섬들은 각기 대여(岱輿), 원교(員嶠), 방호(方壺), 영주(瀛洲), 봉래(蓬萊)로 불리웠다. 각 섬은 높이와 주위가 3만리나 되었고 꼭대기의 평지가 9,000리였으며 섬과 섬 사이는 마치 이웃집처럼 보였지만 그 거리는 자그마치 7만리나 되었다. 섬에는 금과 옥으로 지은 찬란한 궁궐과 누대가 있었고 그곳에 사는 짐승들은 모두 순백색이었다. 그곳에는 또한 아름다운 옥을 열매로 맺는 나무들이 무더기로 자라고 있었다. 그 열매는 너무나 맛이 있을 뿐만 아니라 먹으면 늙지 않고 오래 살 수 있었다. 그곳의 주민들은 모두 신선의 자질을 지닌 사람들로 낮이든 밤이든 훨훨 날아서 돌아다녔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섬의 초인적 주민들에게도 한 가지 큰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섬이 파도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려서 잠시도 안정을 찾을 수 없다는 문제였다.
고민하다 못해 그들은 이 일을 천제께 호소하였고 천제는 섬들이 서쪽 끝으로 떠내려가 신선들이 거처를 잃을까 염려하여 해신 우강(□彊)을 시켜 열 다섯 마리의 거대한 자라들로 하여금 등으로 섬을 떠받치게 하였다. 자라들은 3 교대로 이 일을 수행하였는데 한번 교대하는 기간은 6만년이었다. 다섯 개의 섬은 이제야 비로소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아마 이 안정이 지속되었다면 오늘날 우리들은 이 섬들을 삼신산이 아니라 오신산이라고 부르게 되었을 것이다. 안정이 깨진 것은 갑자기 용백국(龍伯國)의 거인들이 섬들을 떠받치고 있던 자라 여섯 마리를 낚시로 잡아간 데서 비롯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여와 원교 두 섬이 북쪽 끝으로 떠내려가 마침내 바다에 침몰하였고 오신산은 그만 봉래, 방호, 영주의 삼신산이 되고 만 것이다. 이중 방호는 방장산(方丈山)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동쪽의 발해 바다 어딘가에 신선들이 사는 삼신산이 있다는 소문이 퍼진 것은 전국(戰國) 시대 무렵(기원전 3∼4세기)이었다. 그곳에 황금과 은으로 지은 궁궐이 있고 불사약이 있다는 소문이 발해만 지역 주민들로부터 흘러나온 것이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배를 타고 삼신산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그들이 멀리 구름 속에 잠겨 있는 삼신산을 보고 황급히 달려가 보면 섬들이 홀연 물밑으로 꺼져버렸고 어찌 어찌 해서 다 왔다 싶으면 난데 없이 바람이 불고 섬이 사라지는 통에 아무도 그곳에 가본 사람은 없었다. 동쪽 바닷가에 있던 나라들인 제(齊) 나라와 연(燕) 나라 임금들이 삼신산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그 낙원에 있는 불사약을 얻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제나라의 위왕(威王)과 선왕(宣王), 연나라의 소왕(昭王) 등은 탐험대를 조직하여 삼신산을 탐색하게 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이들의 뒤를 이어 가장 적극적으로 삼신산의 탐색에 열을 올렸던 임금이 그 유명한 진시황(秦始皇)이다. 당시 제 나라와 연 나라 지역에는 방사(方士)라는 마술사들이 활약하고 있었는데 진시황은 여러 차례 이들을 시켜 삼신산을 찾아보게 하였다.
그 중 가장 대규모로 조직된 팀은 방사 서불(徐市)을 대장으로 하고 순결한 소년 소녀 500명과 다수의 대원으로 이루어진 탐험대였다. 서불은 대선단을 이끌고 산둥반도를 떠나 삼신산을 찾아 나섰는데 이들은 끝내 돌아오지 않아 그 귀착지는 영원히 미스터리로 남았다. 제주도 서귀포(西歸浦)에는 이들이 지나가면서 새겼다는 '서불과차(徐市過此)'라는 글귀가 남아 있으며 서귀포라는 지명은 바로 서불이 도착했다는 전설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들은 과연 어디로 갔을까?
최근 중국에서는 흥미로운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서불 일행은 제주도를 거쳐 결국 일본 열도에 도착했고 당시 야만 상태에 있던 일본 종족들을 일거에 평정해 최초의 왕조를 열었으니 서불은 곧 일본인들이 개국의 임금으로 떠받들고 있는 신무천황(神武天皇)이라는 것이다. 일본인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깨버리는 이러한 주장의 근거가 터무니 없음은 물론이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신화가 자민족 중심의 논리로 얼마든지 이용될 위험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삼신산 이외에 고대의 문헌에 등장하는 다른 낙원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아득한 옛날 중국에서 동쪽으로 수천 만리 떨어진 곳에 화서씨국(華胥氏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는 하도 멀어서 배나 수레로 갈 수 없고 정신으로나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이 나라는 우두머리가 지배하지 않아도 저절로 다스려졌다. 그 백성들은 순박하여 악착같이 삶을 추구하지도 않고 죽음을 두려워 하지도 않으니 오히려 일찍 죽는 일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누구를 특별히 사랑하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으니 항상 마음이 평온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든 현실의 제약을 받지 않았다. 그들은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뜨거운 줄 모르며 공중을 다니기를 땅 위를 걷듯이 하였다. 구름이나 안개도 그들의 시야를 가리지 못하고 천둥 소리도 그들의 귀를 어지럽히지 못하였다. 대신 복희(伏犧)는 이 나라의 어떤 소녀가 호숫가?찍힌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임신하여 낳은 것이었다. 이 나라는 실로 모든 것이 자연스러움 속에서 이루어지는 태고의 나라였다.
또 우(禹) 임금이 우연히 찾아 들었던 낙원도 있다. 우 임금이 홍수를 다스리고자 전국을 다니고 있을 때 어느날 먼 북방에서 길을 잃어 종북국(終北國)이라는 나라에 들어섰다. 이 나라는 서리도 비도 내리지 않고 짐승이 살지도 않고 초목도 자라지 않는, 언뜻 보면 불모지 같은 나라였지만 기후는 무척 온화했다. 나라 한 가운데에 호리병처럼 생긴 산이 있는데 산꼭대기의 구멍에서 신비한 물이 흘러나왔다. 신분(神 □)이라고 부르는 이 샘물은 난초 같은 향기가 나고 단술 마냥 맛이 좋았다. 백성들은 강가에 살았는데 농사도 짓지 않고 베도 짜지 않았다. 그들은 배고프면 샘물을 마셨다. 그러면 기력이 샘솟았고 간혹 취하도록 마시면 열흘이 지나서야 깨어났다. 그들은 아무 병 없이 백년을 살다가 죽었다. 그들은 노래를 좋아하여 하루 종일 서로 손잡고 노래를 불렀다. 홍수를 다스리느라 지칠 대로 지친 우 임금은 이곳에서 살고 싶었지만 고생하는 중국의 백성들을 생각해 곧 이 나라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낙원 신화들은 문명화 되기 이전, 태고의 소박한 생활을 예찬하는 자연주의적 사상을 담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노자(老子)에 의해 창시된 도가(道家)에 의해 적극적으로 주장되었다.
다시 삼신산 신화로 돌아가서, 동쪽 바다에 신비한 섬이 있다는 상상은 어떻게 해서 가능했던 것일까? 발해만 일대는 가끔 바다에서 신기루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바다 저편에 육지의 도시가 반영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아마 이 현상으로 인해 삼신산에 대한 상상이 일어났을 것으로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물론 실제로 그런 지리적, 기상적 요인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근원적으로는 발해만 일대에 거주했던 동이계 종족의 동방에 대한 향수와 동경에서 비롯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동방 낙원인 삼신산과 서방 낙원인 곤륜산, 그것은 고대에 동과 서로 양분되었던 화하계(華夏系) 문화와 동이계 문화의 대립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전국 시대의 제후들과 진시황의 실패 이후 한무제(漢武帝)는 동방 낙원인 삼신산보다 서방 낙원인 곤륜산에 대한 탐색을 시도하고 여신인 서왕모를 통해 불사약을 얻고자 노력한다. 물론 한무제의 탐색도 실패로 돌아갔지만 어쨌든 삼신산은 곤륜산과 더불어 동양의 양대 낙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고대인들은 곤륜산 만큼이나 삼신산을 유토피아로서 동경했다. 삼신산은 수많은 설화와 소설 속에서 등장했고 조각, 벽화 등으로도 자주 묘사됐다. 삼신산의 유토피아 의식이 건축 분야에 미친 영향도 크다. 고대인들은 정원을 만들 때 반드시 연못을 파고 한가운데에 섬을 조성했는데 그것은 곧 낙원인 삼신산을 상징했다. 그들은 집안에다 자그마한 낙원을 조성했던 것이다.
삼신산 신화는 우리 나라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중국처럼 문학 작품과 미술 자료, 정원 등에 흔적을 남기고 있음은 물론이다. 대표적 예로는 근래에 백제의 왕실 공방(工房) 터에서 발굴된 금동용봉봉래산향로(金銅龍鳳蓬萊山香爐)를 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삼신산이 중국의 바다 동쪽에 있다는 상상은 그것이 한반도에 있다는 생각으로까지 발전해 백두산,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 등의 명산을 삼신산으로 빗대어 말하게끔 됐다.
글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그림 서용선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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