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8월 모나미는 성수동 1,2 공장을 통합, 안산 신공장으로 이전했다. 모나미의 사세 확장으로 성수동 공장은 역할이 한계에 다다랐고 공장 주변 지역도 도시화가 진행될 만큼 진행돼 운영에 애로가 많았다. 생산 품목도 모나미 그림물감, 크레파스, 볼펜, 사인펜, 매직펜, 플러스펜 등에다 연필깎이, 모나미 노트, 샤프연필, 지우개, 샤프연필심 등으로 크게 늘어나 있었다. 모나미는 그 사이 모나미산업과 대전에 있던 오로라연필도 인수했다. 두 회사는 세무조사 때 회사 경영에서 손을 뗀 공동 경영인 소유였는데, 그가 모나미를 떠난 이후 두 회사는 심각한 경영난에 빠졌고 이를 모나미가 사들였던 것이다.모나미 안산공장은 사실 내 손으로 설계를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1981년 나는 미국을 방문, 파커 크로스 등 세계적인 필기구 전문 제조업체를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모나미는 매년 153 볼펜 등에 사용하는 0.7㎜ 크기 볼 수백만달러 어치를 미국의 한 전문 제조업체로부터 수입하고 있었는데, 나의 미국 방문은 그 업체 사장의 초청으로 이뤄졌다. 그때 그 사장의 대접이 어찌나 극진했던지, 뉴욕 도착 다음날 그는 나를 공항으로 데리고 가더니 "기업들이 이곳 저곳에 흩어져있어 하루에 다 방문하려면 항공편을 이용해야 한다"며 전세 항공기에 태웠다. 승객이라곤 그와 나 단 둘 뿐이었다. 그때처럼 미국이 넓고 큰 땅이라는 걸 실감한 적도 없었다. 하루 8,000달러 짜리 전세 항공기를 타고 세계적인 업체를 방문한다니 설렁설렁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파커와 크로스측은 공장내 필기구 반입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다. 회사 기밀이 유출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생산설비 배치 등 공장 생산 라인업과 구조, 사무실 구조 등을 차곡차곡 머리 속에 챙겨 넣었다. 공장 방문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온 나는 보고 느낀 것을 메모했다. 그 때의 경험과 메모는 7년뒤 안산 공장을 설계할 때 유용하게 사용됐다. 총 7,000평 대지 위에 설립된 안산 공장은 연간 2억4,000만개의 볼펜을 생산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추고 있어 단일 공장으로서는 생산능력 면에서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안산 공장 이전을 마치고 한숨 돌리고 난 나는 해외 생산거점 확보 문제로 시선을 돌렸다. 돌렸다기보다는 돌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는 것이 더 솔직한 표현이다.
나는 우리 경제가 이만큼 성장하게 된 원동력 가운데 으뜸이 양질의 저렴한 노동력이라고 생각한다. 평생을 제조업에 바친 나는 누구보다 생산 현장을 잘 안다고 자부한다. 우리나라에 그토록 값싸고 우수한 노동력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은 결코 가능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88년 서울 올림픽을 치르고 난 이후부터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에 민주화의 바람이 불면서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찾으려는 욕구가 분출했다. 나는 당연히 그들이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대우해주려고 노력했다. 실제로 나는 우리 모나미 직원들이 동종 업계 선두 업체의 직원으로서 최고 대우를 받게 해줬다.
하지만 기업 경영 환경은 악화하기 시작했다. 임금이 인상되자 당장 수익이 하향 곡선을 그렸다. 그렇다고 수익 감소를 제품 가격 인상으로 상쇄할 수는 없었다. 다른 업체보다 관리 비용이 10∼15%가 더 들고, 제품 가격 인상도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면서 제품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되는 상황에 부닥쳤던 것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값싼 노동력을 찾아 생산 거점을 해외로 이전하는 것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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