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남대(靑南臺). '남쪽의 청와대'로 불리며 역대 대통령이 휴가 때마다 국정 구상을 하던 대통령 전용 휴양시설이다. '1급 보안지역'으로, 20년 동안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던 곳이기도 하다.그런데 이 곳을 개방하겠다는 노무현 당선자의 공약으로 청남대 주변 주민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대선 때마다 늘 그랬듯이 "밥줄을 졸라매던 청남대와의 악연을 끊을 마지막 기회"라는 기대와 "공약(空約)에 그쳤던 전임 대통령들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또 다시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청원 IC를 빠져 나와 509번 지방도에 들어섰지만 청남대를 알리는 이정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지도에도 없다. 몇 차례 주민들의 설명을 들은 뒤 신대리로 이어지는 길을 5분 가까이 달렸을까. 4겹의 바리케이드와 2m 높이의 검은색 철문이 길을 막고 섰다.
철문 앞에 다다르자 곧바로 경고 방송. "민간인은 출입할 수 없습니다. 돌아가십시오." 철문 왼편의 무인카메라가 이방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쫓는 동안, 초병 1명이 자전거를 타고 득달같이 달려왔다. "돌아가십시오." 그는 어떤 질문에도 "보안입니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오른 편 대청호에는 경비정 1척이 차가운 겨울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잠시 후 승용차 한 대가 바리케이드를 요리조리 피해 철문 앞에 닿았다. 대전에서 왔다는 임모(42)씨는 대뜸 "청남대 구경하러 왔다"고 했다. 그는 "공약인데, 당선되면 바로 지켜야지"라고 투덜대며 저지하는 병사와 한참 실랑이를 벌였다. 소란이 일자 나타난 작전담당관은 "개방된 줄 알고 가끔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며 겸연쩍어 했다. 개방 소문만 무성할 뿐 청남대는 아직 일반인의 접근을 매몰차게 거부하는 철옹성이었다.
청남대 건너편 마을인 충북 청원군 문의면. 마을 입구부터 '청남대 개방 대선공약을 환영한다'는 플래카드가 외지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청남대에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빚더미에 시달려 온 문의면 주민들은 이 플래카드를 만들기 위해 쌈짓돈을 모았다고 했다.
물 맑고 공기 좋은 마을 문의면의 시간은 20년 전으로 묶여 있었다. 도로 양쪽에 늘어선 상가 건물은 대부분 문을 닫은 채 무너져내릴 지경이었다. 너덜거리는 간판엔 두 자리 국번의 전화번호가 흔적으로 남았고, 깨진 유리창에 화사했을 페인트는 뿌옇게 바래 있었다. 주민들은 청남대 이야기를 꺼내자 "속에서 열불이 난다"고 긴 한숨을 지었다.
문의면 주민들과 청남대의 악연은 198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청댐이 들어서면서 청원군에서 가장 번성했던 원래 마을은 물에 잠겼다. 당시 정부는 수몰민을 위해 지금 터에 마을을 조성하고 국내 최고의 국민관광단지 조성을 약속했다. 기대에 부푼 주민들은 농사를 접고 이주비에 빚을 더해 상가를 짓고 모터보트를 사들였다.
하지만 83년 청남대가 들어서면서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됐다. 상수원 보호구역 수질 보호때문이라는 정부의 해명을 믿는 주민은 한 사람도 없었다. "공무원 수련원을 만든다더니 갑자기 새까만 공수부대가 몰려오더라니까. 550만원 주고 산 모터보트는 띄워보지도 못했어. 10년 넘게 집 앞에 세워뒀는데 온전할 리 있어. 보고 있으면 속상해서 고물 된 거 남 줬지." "옛날 얘기는 고만두라"며 정근용(72)씨가 방바닥을 쳤다.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묶이고도 한동안 유람선이 떴는데 무슨 소리야. 다 청남대를 보호하려고 대청호에 온갖 환경관련법을 끌어다 붙인 거 아녀." 김신환(68)씨의 보트도 20여년 째 헛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모터보트를 샀다가 이주비 몽땅 날리고 빚까지 진 집이 20가구가 넘는다"고 했다.
관광객을 기대하며 상가를 지었던 주민들도 피해를 보긴 마찬가지였다. 이모(55)씨는 "2층 이하는 허가도 안 내주고 건물 색깔까지 지정하는 난리를 피우더니 말짱 도루묵이야. 수몰되기 전엔 머슴도 서넛 거느리고 살았는데 쫄딱 망했지. 한동안은 외상 쌀도 못 얻어먹을 정도였어." "대청호가 막혔는데 누가 와. 세도 안 나가고 장사도 안돼 빚 갚느라 내외가 막노동까지 했다면 말 다했지." 김모(62)씨는 "그 긴 세월 말해서 뭐해"라며 먼 산만 바라봤다.
문의면 주민들이 그 동안 침묵했던 것은 아니다. 주민들은 "그야말로 '먹고살게 해달라고' 시위도 하고 선거때 마다 진정을 넣었다"고 했다. 하지만 전임 대통령들은 '개방 공약'으로 표만 훑어갈 뿐 '나 몰라라'로 일관했다. "YS는 청남대를 개방하고 희망의 다리와 분수대를 설치한다더니 고작 한 게 청남대 정문을 4㎞ 뒤로 물린 것 뿐이야. DJ는 그나마도 안 했어."
농협 신협에 진 빚이 얼만지 한참 헤아리던 이상준(56)씨가 "충청도 사람들이 순해서 그래. 전두환 때 '경제학살'이 여기서 벌어졌는데 막말로 광주처럼 세게 밀고 나갔어 봐.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어"라고 한탄했다. 10여년을 속아온 주민들은 노 당선자의 공약에도 반신반의다. "시퍼런 물만 보면 징그럽다"며 눈물을 훔치던 한 중년 여성은 "그이도 가봐야 알지, 지금까지 약속 안 지킨 사람이 어디 한둘이야"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청남대 개방에 대한 주민들의 기대가 사그라지는 것은 아니다. 국제컨벤션 센터로 활용하자는 거창한 의견도 있고, 개방이 안될 바엔 행정수도 이전에 맞춰 대통령 집무실로 꾸미자는 발 빠른 계산도 있지만 대다수 주민들의 꿈은 여전히 소박하다. "사람들이 다 아방궁으로 알고 있는데 궁금해서라도 한번씩 구경 올 거 아닙니까. 그럼 밥이라도 한끼 먹고 대청호에서 모터보트도 타고 하면 숨통이 트일 겁니다." 문의청소년수련원 신성국 신부 는 "1년에 고작 1주일 묵는 대통령 한 사람을 위해 수 백 명의 군인이 배치되고 1만 여명의 생존권이 희생당하는 부조리를 막기 위해서라도 청남대를 주민시설로 환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물에 잠긴 고향 생각하며 낚시 하는 게 꿈이유. 젊은 사람이니까 일단 지켜봅시다. 이번엔 그냥 안 넘어가유." 넋 놓고 대청호를 바라보던 한 수몰민(64)은 작은 주먹을 쥐어보였다.
/청원=글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사진 류효진기자
■ 청남대는
1983년 완공된 청남대는 충북 청원군 문의면 신대리 일대에 숨어 있다. 옥새봉 월출봉 소위봉 작두산 등 4개의 산과 드넓은 대청호가 겹겹이 에워싼 천혜의 요새다. 거기에 바리케이드와 철조망, 1개 대대의 공수부대가 뭍길을 막고 경비정이 물길을 막는다. 하늘 역시 반경 4.8㎞ 고도 3㎞가 비행금지구역.
'1급 보안지역'인 청남대의 전경을 본 일반인은 아무도 없다. 문의면 주민들은 "청원의 으뜸인 청원군수도 못 봤다"고 일갈했다. 이 때문에 설도 무성하다. "당시 막노동 일꾼을 마을에서 차출해 입막음 정신교육도 시켰다"는 한 주민(45)은 "아버지가 흙 퍼 나르는 일을 했는데 눈 감는 날까지 청남대의 '청'자도 꺼내지 않았다"고 혀를 찼다. 또 다른 주민은 "대한민국 최고의 명당 자리라는 말만 들었다"고 거들었다.
청남대는 원래 수몰지구에서 옮겨 와 조성하던 한옥 전통단지를 모조리 뒤엎고 세워졌다. 주민들은 그때 기억을 떠올리며 청남대 규모가 30만평 정도라고 추측할 뿐이다. 5·6공 시절 대통령의 청남대 호출이 실세의 상징이자 신뢰의 보증 수표로 통하기도 했다. 청남대가 3개의 건물과 골프장, 낚시터, 정원을 갖춘 낙원이라는 소문도 당시 '은총'을 입은 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설'일 뿐이다.
청남대 탄생 배경에 관해서는 "80년 대청댐 준공식 때 전두환 전 대통령이 경치에 반해 지시했다"는 설부터 "모 지역 국회의원이 아부용으로 바친 것"이라는 설까지 분분하다.
/고찬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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