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대통령 특사로 방한한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가 13일 '북한 핵 포기 시 에너지 지원 용의'를 밝힌 것은 '타협은 없다'는 미 정부 방침의 변화를 시사하고 있다. 켈리 특사의 말은 여전히 북한의 선(先) 핵 포기를 전제하고 있지만, 미 정부가 금기시했던 대가를 처음으로 언급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액면 상으로는 북한이 핵 포기를 하면 전력보상이 따를 가능성을 밝힌 것이지만, 보다 광의의 차원에서 핵 포기와 에너지 지원, 나아가 체제보장을 시차적, 포괄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해석도 가능해진다.켈리 특사는 더 구체적으로 "핵 문제가 해결되면 미국은 다른 국가 및 민간 투자자들과 함께 북한의 에너지 문제 해소방안을 모색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북한이 당장 어려움을 겪고있는 에너지 난을 해소하는 것은 물론 민간차원의 경제지원 가능성까지 예고하고 있다.
사실 이번 핵 위기는 지난해 10월초 북한의 농축우라늄 핵 개발 시인으로 촉발됐지만, 미국의 중유공급 중단 조치로 인한 북한의 에너지난 가중으로 확대 재생산된 측면이 강하다. 미국이 해마다 지원해온 50만 톤의 중유는 지난해 북한의 전체 원유 도입량 67만2,000톤의 절대량을 차지하고 있다. 심각한 전력난은 식량에도 악영향을 미쳐 지난해 북한의 쌀 생산이 전년에 비해 7∼20% 줄었다고 세계식량계획(WFP)가 최근 보고하기도 했다.
때문에 북한이 핵 개발을 포기하고 북미 양국이 협상테이블에 앉으면 1994년 위기 때처럼 불가피하게 전력 지원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될 게 확실하다. 미국은 그 동안 핵 포기의 대가로 경수로 2기를 지어주는 94년 제네바 합의에 대해 불만을 피력해왔기 때문에 북미간 대화가 이루어지면, 새로운 핵 통제 시스템과 이에 따른 또 다른 형식의 전력 지원 방안이 논의될 전망이다.
북한이 지난해 12월12일 핵 동결 해제 조치 이후 일관되게 핵 개발이 아니라 전력 생산이 목적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도 다분히 이 같은 '빅딜'을 염두에 둔 계산된 행보이다. 북한은 10일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면서도 "핵 활동은 오직 전력생산 등 평화적 목적에 국한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산하 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의 알렉산드르 칼랴긴 부소장은 "북한의 핵 위협은 전적으로 전력을 겨냥한 선전전"이라고 단언했다.
정부와 노무현(盧武鉉) 당선자 측도 대북 전력지원을 지렛대로 북한을 설득하고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유도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이 요구하는 체제보장의 이면에는 전력난이 자리잡고 있다"면서 "결국 이번 사태도 과거처럼 북한의 핵 포기와 국제사회의 전력지원 문제로부터 풀려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이 같은 구상은 21일 서울서 열리는 9차 장관급 회담에서 윤곽을 드러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이와 관련, 세계 최대 석유기업인 엑손 모빌의 사할린 가스전이나 한국가스공사가 직·간접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코빅틴스크 가스전을 대북 전력 지원 카드로 활용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즉 북한을 관통하는 가스관을 건설하고 가스관이 지나가는 곳에 발전소를 건설해 북한에 전력을 보충해주자는 것이다. 특히 엑손 모빌은 이 사업의 추진을 적극 모색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대북 전력 지원은 북한의 핵 포기가 전제돼야 하고, 더욱이 비용 부담을 둘러싸고 한미일 간에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또한 인도적 지원과 달리 군사적, 사상적 문제와 결부돼 남남갈등을 유발할 수도 있다.
/이동준기자 d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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