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동구 천호동에서 산부인과를 운영하는 의사 박모(51)씨는 분만실만 보면 지난 10여년간의 세태변화를 한눈에 느낀다고 말한다. '아들 딸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국가적인 저출산 가족계획이 풍미하던 1980년대 말까지 분만실은 하루 한명 꼴, 한달 평균 30∼40명의 신생아를 받느라 편할 날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신생아 분만은 한달에 고작 한 두 명꼴로 지독한 불황에 시달린다. 박씨는 "병실도 축소하고 출산 보조 아줌마도 내보내는 등 규모를 줄였지만 여의치 않아 지난해 7월부터 비만치료 클리닉에 주력하고 있다"며 "산부인과 내부적으로 이대로는 살길이 막막하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다"고 토로했다.출산율 저하현상이 심각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일본은 1989년 출산율이 1.57명대에 달하자 '1.57쇼크'라며 출산장려정책을 쏟아내는 부산을 떨었지만 2001년 한국의 출산율은 세계최저수준인 1.30명이다. 선진국에서는 100년만에 형성된 저출산 고령화 기조가 한국에서는 불과 20년만에 이루어져 세계 인구사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다.
출산율의 급속 저하는 보육문제 등 외적 요인에다 만혼, 독신풍조, 딩크족, 손쉬운 이혼 등 20년전만 해도 상상하지 못한 가치관의 변화에 따른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지난해 늦장가를 간 회사원 송모(34·서울 관악구 신림동)씨는 장남이면서도 2세에 대한 계획을 갖지 않고 있다. 송씨는 "부모로부터 '손자를 보게 해달라'는 압력에 시달리지만 약사인 아내와 출산에 대해 심각한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다"며 "아이를 갖고 싶으면 마흔이 넘어 입양하자는 계획을 세웠다"고 말했다.
결혼 2년째인 회사원 윤모(28·여·서울 양천구 신정동)씨는 최근 남편과 합의 하에 임신 2개월 된 뱃속 아이를 양가 부모 몰래 지웠다. "애를 키울 사람이 없어 내린 결정"이라고 말끝을 흐린 윤씨는 "육아 때문에 일을 포기하긴 싫었다"고 말했다.
결혼이나 자녀갖기에 대한 가치관 변화는 세대간에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00년 전국 출산력 및 가족보건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결혼필요성에 대한 태도에서 '해도 좋고 안해도 좋다'는 응답이 25∼39세 여성연령대에서 45%이상을 차지하는 반면 40대 이상은 17∼32%를 보이고 있다. 특히 결혼을 반드시 해야한다는 응답은 60대 이상 여성은 절반이 넘는 52%인 반면 25∼29세 여성은 불과 13.8%에 지나지 않았다. 또 15∼44세 여성의 '자녀필요성'에 대한 태도에서도 1991년 조사에서는 90.3%였던 반면 2000년에는 58.1%밖에 되지 않았다.
육아문제나 보육비 부담 등 외부환경적 요인도 저출산을 부추기고 있다. A 골프장회원권거래소 임모(33) 과장은 "소득의 상당액을 자녀교육비로 쏟아 부어야 하는 현실에서 두 자녀를 키우기도 무리라는 생각에 최근 정관수술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같은 출산율 저하는 20∼30년 뒤 인구 불균형과 노동인력 부족, 국방, 노후연금 지급문제 등 총체적 파장을 일으키는 반면 단기간의 회복이 어렵다는 데 큰 문제가 있다. 1970∼80년대 저출산을 경험한 뒤 출산장려정책을 펴고 있는 유럽과 일본도 출산율이 미미하게 상승하거나 추가 저하를 예방하는 효과밖에 얻지 못하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김승권(金勝權) 인구가족팀장은 "출산율의 급격한 저하는 장기적으로 국가에 막대한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며 "추가저하를 막기 위한 출산장려정책이 조속히 추진돼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출산율 저하는 IMF위기 이후 나타난 일시적인 현상이고 인구감소는 최소 60년이상 걸리는 만큼 당장 출산장려정책을 쓸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세계최저수준의 출산율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적극적인 정책을 펴지 못하고 고민하는 데는 이같이 낙관과 우려가 교차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진황기자 jhchung@hk.co.kr
이준택기자 nagne@hk.co.kr
● 국내 출산장려정책 방향은
정부의 출산장려정책은 시기를 정하는 일만 남았을 뿐 방향은 잡혔다고 볼 수 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9월 저출산에 대비한 범 정부적인 인구정책을 마련키 위해 연구용역을 발주했다. 지난 30년간 유지됐던 저출산 위주의 가족계획정책의 획기적 전환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보건복지부는 3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도 저출산에 대비한 인구 및 가족지원 종합대책을 보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출산 보조수당, 아동양육 보조수당 지급 방안이나 부양가족 세액공제, 교육비 경감혜택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 대부분은 일찍이 저출산을 경험한 선진국들이 출산장려를 위해 내놓은 정책들로 1960년대 이후 지속해온 인구억제정책을 1996년 '중립적' 입장으로 바꾼 뒤 10년도 되지 않아 정책의 대전환이 이루어질 전망이다.
보건복지부는 "국토면적이나 경제력, 향후 남북관계를 고려한 적정한 인구규모나 인구구조등에 대한 종합적이고 면밀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서 "범정부적 차원에서 장기 추진돼야 할 사항"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6월 저출산에 대한 연구용역결과가 나오는 대로 공청회 등의 절차를 거쳐 범 부처차원의 대책기구를 결성, 적극적인 출산장려정책을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보건복지부 오대규(吳大奎) 건강증진국장은 "인구정책 전환은 사회각계의 의견을 수렴, 종합적인 장기대책을 마련해야할 사안"이라며 "노동, 국방, 교육, 주택등 다양한 분야에서 장기적인 영향이 검토돼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 대한가족보건복지협회의 이시백(李時伯·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회장은 "국토 면적이 좁고 부존자원이 부족하며 인구밀도가 높은 우리나라에서는 당분간 저출산 추세를 유지해도 된다"며 "앞으로 여성과 외국 수입 인력의 경제활동 참가가 더욱 늘고 남북이 통일되면 오히려 잉여 노동력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정진황기자
● 외국에서는
저출산에 따른 인구 감소는 세계 각 선진국들의 해묵은 고민거리 중 하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적극적인 출산장려정책을 편 프랑스를 비롯, 독일 스웨덴 등 유럽 각국은 각종 출산수당 지급과 복지정책으로 현재 1.5∼1.8명의 출산율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 싱가포르도 1990년대 이후 출산율 증가를 위해 다각적이고 포괄적인 조치를 시도하고 있다.
출산장려정책의 원조 국가격인 프랑스는 수십년이 넘는 지속적인 정책에 힘입어 유럽에서 비교적 높은 출산율(1.89명·2001년)을 나타내고 있다. 39년 모든 출생아에 대해 산전 및 모성수당을 지급하는 가족수당제도를 도입한 프랑스는 더 일찍 교육을 시작하고 더 늦게 교육을 마치는 제도를 채택해 여성의 직장·가정생활 병행을 지원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자녀수 증가에 따라 주택수당은 늘고 세금은 줄어드는 혜택 또한 저출산 억제의 주요인으로 꼽힌다. 독일 스웨덴은 출산율 증가를 위해 세금감면은 물론 출산기피 원인으로 꼽히는 여성 차별적 법적 요소를 제거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94년 도시지역 보육시설 확충을 골자로 한 '에인절 플랜'을 내세워 출산독려에 나선 일본은 초등학교의 방과후 보호시간 연장, 유치원 서비스 확충 등 양육 인프라 구축에 사활을 걸고 있다. 91년 '육아휴직법'을 만들어 출산 후 최대 1년의 육아휴직을 허용하고 아동수당(5,000엔∼1만엔)지급 대상을 종전 2자녀 이상에서 1자녀 이상으로 늘렸다.
87년 출산억제 정책을 폐기한 싱가포르도 '능력이 되면 세 자녀 이상을 갖자'는 슬로건을 앞세워 미혼 남녀의 결혼을 권장하는 등 각종 정책으로 1.6명에 머물던 출산율을 1.87명으로 끌어올렸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관계자는 "해외 각국의 출산장려정책을 종합 분석해볼 때 출산 수당과 같은 금전적 보상보다는 사교육비 절감, 영·유아들에 대한 공공보육시설 확충과 같은 복지환경 구성이 실질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준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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