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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42)긴 터널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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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42)긴 터널의 끝

입력
2003.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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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2월 이사회와 주주총회를 거쳐 나는 모나미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57년 모나미의 전신인 광신산업에 입사한 이후 18년만이었다. 이제 회사 재건을 위한 모든 책임과 권한이 내게 주어졌다고 생각하니 어깨가 무거웠다.나는 회사 자금사정을 다시 한번 챙겼다. 경리 이사에게 현재 회사가 보유한 현금이 얼마나 되는지, 즉시 현금화가 가능한 자산은 어떤 것이 있는지 상세히 파악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은행마저 모나미와의 금융 거래에 소극적인 상황에서 현금 이외에 믿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몇시간 뒤 경리 이사가 "이것저것 다 합치면 2억원은 된다"고 보고했다. 나는 이 2억원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고민하다 은행 지점장으로 있던 대학 동창을 찾아갔다. 그리고 현재 모나미가 처한 상황을 설명하고 어떤 해결책이 있는지 자문을 구했다. 역시 어려운 문제에 부닥치면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는 여러 사람의 지혜를 빌리는게 훨씬 나았다. "가지고 있는 현금이 2억원이라고 했나. 그 정도면 됐네. 우선 2억원으로 7억5,000만원 짜리 적금을 들게. 그리고 그 적금을 담보로 7억5,000만원을 대출받게. 그러면 일단 과징금을 내는 데 필요한 자금은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거지."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하고 나는 무릎을 쳤다. 나는 용기백배 했다. 회사로 돌아온 나는 경리 이사에게 대학 동창이 일러준 방법을 말해주고 그대로 이행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거액을 빌리려면 은행과 거래를 자주 일으켜 신용을 쌓아야 했다. 적금을 들었지만 즉시 대출은 어려웠다.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대출금이 나올 때까지 과징금 납부 기간을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국세청에 근무하고 있던 다른 대학 동창을 찾아갔다.

"자네 징수유예를 신청하게. 지금은 돈이 없지만 벌어서 세금을 내겠다고 신청하는 것이 징수유예 제도일세. 현재로선 자네나 모나미에게 가장 급한 게 징수유예 신청일세. 유예 기간은 1년 정도이고 재연장도 가능하네. 그리고 징수유예 신청과 함께 분할 납부도 신청하게. 한꺼번에 과징금 7억5,000만원을 낼 수 있는 기업이 얼마나 되겠나. 아마 징수유예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분할 납부도 가능할걸세. 하지만 징수유예나 분할납부의 최종 결정은 청장 고유 권한이라, 내가 도움을 줄 수는 없을 것 같네."

나는 즉시 국세청에 징수유예와 분할납부를 신청했다. 혹시 검찰이 수사한 사안이라는 이유로 징수유예 신청을 받아주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다. 장문의 탄원서라도 쓸까 생각도 해봤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징수유예와 분할납부 신청이 받아들여졌다.

징수유예와 분할납부 결정이 내려진 날, 나는 마치 긴 터널을 빠져나온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혼자 술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길게만 느껴지던 지난 시간들을 떠올렸다. 고비 때마다 내게 조언과 협력을 아끼지 않은 친구들, 나와 함께 회사를 살리기로 결심한 간부들, 동요없이 생산라인을 지켜준 직원들‥. 그들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나는 일단 세금을 분할 납부하면서 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세금이 너무 터무니없이 많이 부과됐다는 것이 모나미의 주장이었는데 장기간 소송 끝에 법원은 모나미의 손을 들어줬다. 승소 판결이 내려진 날, 나는 회사에서 먼저 손을 뗐던 공동 경영인을 떠올렸다. 끝까지 고락을 함께 하지 못한 그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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