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532년 1월11일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폭도들이 '니카'(그리스어로 '승리'의 뜻)를 외치며 소요를 일으켰다고 해서 이 사건을 니카 반란이라고 부른다.반란은 겨울 축제가 벌어지고 있던 콘스탄티노플의 대형 전차 경기장에서 점화됐다. 경기장은 경주를 보러 온 시민들로 꽉 차 있었다. '로마법 대전'을 완성시켜 유럽 법률 체계의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유명한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도 경기를 참관하고 있었다. 녹파(綠派)라고 불리던 당파의 군중들이 갑자기 황제에게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에는 전차 경주의 경기 단체와 도시의 행정 구역별 정파를 겸한 파벌들이 있었다. '데모이'라고 불렸던 이 파벌들 가운데 세력이 가장 컸던 것은 청파(靑派)와 녹파였다. 유스티니아누스1세는 자신의 정치적·종교적 정책을 지지하는 청파를 비호하고 있었다.
녹파의 야유가 계속되자 청파 관중들도 맞서 야유를 보냈고, 이내 두 파벌 사이의 육박전이 시작됐다. 경기는 곧 중단됐고, 두 파벌의 관중들은 밖으로 쏟아져 나와 싸움을 계속했다. 거리의 군중이 합세해 콘스탄티노플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황제가 이 폭동의 책임을 물어 두 파벌 모두의 지도자들을 처형하기로 결정하자, 청파와 녹파는 한 목소리로 황제 타도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 소란을 이용해 반(反)황제파 원로들은 황족 히파티오스를 새 황제로 옹립했다. 유스티니아누스1세는 황위를 포기하고 피신하려 했지만, 황후 테오도라는 남편을 제지하고 게르만 용병대에게 명해 전차 경기장에 모여 있던 반황제파 군중 3만여 명을 도살했다. 이어 히파티오스와 반란 주동자들이 처형되면서 황제는 전제 권력을 되찾았다. 아내 덕이었다.
고 종 석/논설위원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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