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근 지음 이학사 발행·1만 9,000원묵적의 겸애(兼愛) : "쫀쫀하게 내 새끼, 내 아버지 하지 마라. 그러니 사회, 세계가 맨날 이 모양 이 꼴 아니냐. 야, 이제 좀 자신이 어디 소속이라는 닫힌 관점이 아니라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무소속의 열린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 봐."
양주의 위아(爲我) : "바보같이 누굴 위해 사는 거야? 국가와 민족, 또는 가족? 그러다 죽어 봐. 그럼 끝장이야. 널 위해 울어 준다고?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 난 나를 위해 살 거야!"
철학책에서 이런 문장을 만나다니, 뜻밖이다. 중국 고대 철학의 비주류에 속하는 묵적의 겸애설과 양주의 위아설을 설명하기에 앞서 문패 삼아 걸어놓은 글이다. 철학책 하면 흔히 떠올리게 되는 무거움에서 벗어나 일상 생활에서 쓰는 입말로 내뱉듯 툭 던진 것이 별스럽다.
젊은 철학자 신정근(37·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이 '동양철학의 유혹'에서 구사하는 말투는 이런 식이다. 철학책의 어법 치고는 낯설고 다소 경망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튀는 글쓰기는 "철학은 어렵다, 그리고 골치 아프다. 그래서 피하고 싶다"는 독자들에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일부러 저지른 일탈이다.
그는 대중성과 전문성,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시도는 위험한 줄타기와 같아 자칫 어느 한 쪽으로 쏠렸다간 '타락' 또는 '얼치기'로 비난받을 수 있음을 알고 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런데도 안전하고 모범적인 글쓰기를 버리고 굳이 모험에 나선 것은 철학을 대중에게 침투시키려는 작전이다. 엄숙한 표정으로 알아듣기 힘든 말만 늘어 놔서야 누가 유혹에 넘어오겠느냐는 계산이다.
'말랑말랑한' 동양철학 입문서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엄격한 논증 따위의 무거운 갑옷을 벗어 버리고, 동양철학을 생활 주변의 이야기로 술술 풀어가고 있다.
꼭 수다쟁이가 진행하는 토크쇼를 보는 것 같다. 그러나 허튼 소리는 안 한다. 술렁술렁 읽다 보면 고루하고 따분할 것 같은 동양철학이 어느새 '지금, 여기, 나와 우리 사회의 이야기'로 다가와 앉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화체로 쓰여진 이 책에서 지은이의 진행 방식은, 그의 말투를 흉내내자면 이렇다. "자, 이제 이러이러한 얘기를 꺼내려고 합니다. 벌써 머리 속에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 같다구요? 긴장하지 마시라. 그게 뭐 별 겁니까. 어젯밤 옆집에서 벌어진 어쩌구 저쩌구 사건 같은 거죠. 아이구, 이거 한참 들어가다 보니 얘기가 좀 어려워졌군요. 숨 차세요? 그럼, 머리도 식힐 겸 퀴즈나 한 번 풀어보시죠."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우선 동양철학에서 자주 쓰이는 주요 개념을 소개한다. 그 개념의 어원부터 사회적 맥락, 철학적 변용과 전개 과정까지 차례로 설명한다. 둘째 마당은 주제별 산책이다.
사람다움, 평등, 환경 등 철학의 고민거리를 현재 한국인이 보고 겪는 현실의 문제와 엮어서 이야기한다.
마지막 셋째 마당에서는 일상에서 늘 마주하는 개념, 예컨대 게으름과 부지런함, 성실과 변덕, 빨리빨리와 느리게 등 대립쌍을 이루는 개념을 동양철학으로 곱씹어본다.
지은이는 독자를 유혹하기 위해 온갖 이야기와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도가 철학의 기본 개념 설명은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포스터와 네덜란드 사진작가 폴 드 노이어의 작품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불교철학의 연기론에서는 충무로 히트영화 '친구'의 상스러운 대사를 생각할 거리로 던지는가 하면, 엄격한 법치를 주장한 법가 철학을 설명한 뒤 헤비메탈 그룹 '메탈리카'의 음반 표지(밧줄로 꽁꽁 묶인 채 삐딱하게 기울어진 모습으로 서있는 정의의 여신상이 그려져 있다)를 제시하며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사회 부조리를 생각케 한다.
사람다움이 뭐냐를 다루는 대목에서는 '부자 되세요' '나는 부자 아빠를 꿈꾼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사랑하는 이에게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등 요즘 유행하는 광고 카피를 신랄한 비판의 도마에 올려 놓는 식이다.
노태우 박정희 두 전직 대통령의 연설문이나 어록, 박노해와 윤동주의 시, 김민기의 노래 '공장의 불빛', 팝송 '마이 웨이', 안락사 논쟁을 다룬 신문 기사,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고대 미술품의 도판 등 별의별 재료로 철학을 요리해 내놓으면서 디저트로 퀴즈와 '더 읽을거리'까지 제공한다. 독자는 유쾌한 기분으로 동양철학의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즐길 수 있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