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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 하인리히 뵐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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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 하인리히 뵐을 그리며…

입력
2003.0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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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독일의 새해 정서는 우울하다. 성탄과 제야의 통과의례이다시피한 성탄절 오라토리움, 백조의 호수,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위한 음악회도 끝났고 새해 첫날 식탁에 오른 잉어요리를 먹는 일도 끝이 났다. 축제로부터 귀환하자 일상에 놓여있는 것은 높은 실업률, 세금과 물가인상, 공공서비스노조의 파업 위협, 재집권에 간신히 성공한 사민·녹색당 연정의 선거공약파기 파문, 이라크전 발발시 참전 여부 같은 심각한 난제들이다.그래도 새해가 되자 도서 비평가들에게는 한 건의 낭보가 있다. 지난 가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개막 때부터 선풍을 일으켰던 스캔들 투성이 대중가수 디터 볼렌의 고백록 '진실'이 새해가 되자 드디어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떠난 것이다. 스웨덴 출신의 추리작가 헤닝 만켈의 신작 '무용교사의 귀향'과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이야기로서의 삶'이 이 소란한 책을 밀어내고 선두에 착륙해 있기 때문이다. 마르케스는 움베르토 에코와 함께 독일인이 가장 많이 읽는 외국 작가이다. 50만부가 팔려나간 볼렌의 책은 출판사 하이네와 서적 공급상들에겐 호재였지만, 독일 출판계의 질적 하락을 암시하는 알리바이가 아니냐고 불쾌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독일은 지금 지난 세기에 두 번이나 전쟁을 선포한 전범국으로서 새 세기에 참전국이 돼 또 다시 무기를 잡아야 하느냐는 엄숙한 도덕적 물음 앞에 서있다. 슈뢰더 정부에 대한 이라크전 반전 압력과 반전 시위는 그래서 차라리 철학적이다. 이럴 때 그들은 자신들이 '쾰른의 선인'이라고 불렀던 노벨상 수상작가 하인리히 뵐을 그리워한다. 전쟁에 대한 그의 화해 없는 분노, 매수되지 않는 용기, 극단적 정직, 금욕적 각성이 영혼의 영점지대였던 전후 독일에 정신적 식량을 제공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2001년에는 유품 중 그가 2차 대전 징병 당시 최전방 병사로서 띄운 눈부시도록 정직한 미공개 서신들이 출판돼 전쟁이란 이름의 농간, 녹초가 된 소모품으로서의 군인, 전쟁 속에 찾아오는 돌연한 권태, 질식할 듯한 무의미들을 비감하게 증언해 주었다.

이 겨울 그의 단골 출판사였던 키펜호이어 앤드 비치가 기획한 27권의 전집중 첫 3권이 막 서점에 도착해 있다. 당시 그는 너무 일찍 다시 고개를 드는 인종주의, 극우주의를 경고했고 정치가에 대한 건강한 불신을 강조한데다 테러조직 적군파의 사회악 비판 기능까지 옹호함으로써 도무지 편안하지 않은 공격자로 낙인됐었다. 지난해 섣달 이곳 언론은 1985년 사망한 그의 17주기를 정중히 추모했다.

귄터 그라스의 정치성, 마르틴 발저의 극우적 발언소동 속에서 증류수 같은 뵐의 신념에 대한 독일인의 연모는 그래서 소중하다.

강 유 일 소설가 라이프치히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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