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뒤가 꽉 막혀있을 때일수록 냉정해야 한다. 분위기 전환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현 상황을 직원들에게 상세히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일이다. 그래야 일치단결된 힘으로 난국을 헤쳐나갈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즉시 전체 직원이 참석하는 조회를 열었다."현재의 상황은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회사가 이대로 문을 닫느냐 아니면 기사회생하느냐는 오로지 여러분들 손에 달려 있습니다. 앞으로 저를 포함해 사원 여러분의 생활이 더 고통스러워 질 것입니다. 월급도 절반 밖에 지급하지 못하는 사태가 올 수 있습니다. 그럴수록 용기를 가집시다. 할 수 있습니다."
나는 훈시 말미를 그렇게 장식했다. 어떤 말로도 직원들을 위로할 순 없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뿐이었다. 조회를 마친 뒤 나는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 호소에 가까운 제안을 했다.
"이제 여러분과 내 손 안에 모나미의 미래가 있습니다. 저는 끝까지 남아 회사를 살릴 겁니다. 집을 포함해 제 재산 모두를 내놓겠습니다. 모두 팔겠습니다. 물론 턱없이 모자라겠지만 더 찾아보면 길이 보일 겁니다. 여러분들에게 나처럼 개인 재산을 내놓으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장님과 함께 회사를 떠나실 분들은 떠나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한번 저와 함께 남아 이 회사를 살려봅시다."
간부들은 침묵을 지켰다. 막상 회사가 문을 닫을지도 모르는 상황 앞에서 주저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입장을 나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최고 경영자가 모든 재산까지 걸고 회사를 지키겠다고 말했지만 순순히 그 말을 다 믿는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침묵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사를 떠나도 좋다고는 했지만 나도 인간인지라 "운명을 함께 하겠다"는 말을 은근히 기대했던 것이다. 그 때 한 간부가 무거운 정적을 깨뜨렸다.
"사장님도 포기하신 일을 우리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다른 간부들도 공감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간부들은 별다른 말없이 자리에서 하나 둘 일어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나 역시 그들을 붙잡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는 심한 절망감과 함께 배신감마저 느꼈다. 적게는 몇 년에서 많게는 10여년 이상 동고동락한 사이 아니던가, 그런데 회사가 어려워지니까 이렇게 발을 빼다니….
나는 비탄에 잠겨 퇴근후 집에 돌아와 밤늦도록 혼자 술잔을 기울였다. 지나간 세월을 술잔에 담아 마시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모든 것이 한바탕 꿈만 같았다. 50년 가까이 살아온 내 삶의 결과가 고작 이것인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누구보다 믿었던 간부들마저 등을 돌리고 나니 허무함과 허전함이 더했다. 야속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했다.
그때 말없이 술만 마시던 남편을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가 초인종 소리를 듣고 나갔다 오더니 "회사 분들이 오셨다"고 알려왔다. 간부들이었다. 내가 술상을 앞에 놓고 있는 것을 본 간부들은 잠시 주뼛 주뼛하더니 나를 빙 둘러싸고 앉았다.
"부사장님, 낮에는 저희가 생각을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희 모두 부사장님을 따르겠습니다. 모두들 얼마 안되지만 회사를 살리기 위해 십시일반으로 내놓을 수 있을 만큼 재산도 내놓기로 했습니다."
코끝이 찡했다. 내 재산과 그들 재산을 합쳐 봐야 추징금 액수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하지만 혼자 보다는 여럿이 함께 나누면 고난과 고통도 덜한 법이었다. 우린 통금이 다 되도록 술잔을 부딪쳤다. 내게는 직원들의 마음을 되찾았다는 사실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크나 큰 기쁨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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