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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일기 / 동네 과일가게와 商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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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일기 / 동네 과일가게와 商道

입력
2003.0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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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퇴근하는 생활을 접고 나니 동네에서 배우는 세상살이 공부가 쏠쏠하다. 특히 아파트 단지안 가게들의 흥망성쇠를 지켜보면, 마케팅 공부를 따로 할 필요가 없다. 작은 걸 탐내다 보면 고객들의 신뢰를 잃기 쉽고, 단골 만드는 지름길은 철저한 1대1 서비스라는 건 동네 과일가게와 세탁소에서 배웠다.단지안 과일가게를 눈여겨 본 건 꼭 1년 전. 그 앞 한 귀퉁이에서 호떡을 구워 팔던 아줌마가 어느날 과일가게 주인이 되고부터였다. 30대 후반쯤일까? 강추위속에서도 꿋꿋이 호떡을 굽던 모습이 남달리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하시더니 잘 됐네요.” 축하의 말을 건네고 단골이 되었다. 장사가 꽤 잘 되는 듯 뒤쪽 김밥집을 내보내고 미니 수퍼까지 겸했다. 젊은 여자가 정말 억척스럽게 사는구나 싶었는데 어느날부터 인가 슬그머니 과일의 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내 눈앞에서 상한 복숭아를 담아주는 걸 보고는 정나미가 떨어져 발길을 끊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몇 달이나 지났을까. 그녀의 과일가게는 문을 닫았다. 너무 장사가 잘 돼 더 좋은 자리로 옮겨간 것일까, 아니면 나처럼 등돌린 손님이 많아진 것일까. 사연은 알 수 없지만 갈 때마다 야박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던 걸 기억하면 아무래도 후자인 것만 같다.

새로 개발한 과일가게는 좀 멀긴 해도 주인 아저씨의 전문가 의식이 마음에 꼭 든다. “안 팔면 안 팔았지, 맛없는 물건은 취급하지 않는다”고 큰 소리를 치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그의 과일은 좀 비싸긴 해도 한번도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 멀쩡하게 진열해 놓은 과일을 “들여놓고 보니 맛이 떨어진다”며 못사가게 말리기도 한다. 단골이 된지 얼마 안돼 난 아저씨가 권하는 과일이라면 주저없이 장바구니에 집어넣게 됐다.

기분 좋은 것은 과일가게 아저씨처럼 프로의식을 가진 상인이 우리 주변에 적지않다는 사실이다. 아침마다 ‘세탁’을 외치며 아파트 복도를 순회하는 세탁소 아저씨는 1대1 마케팅의 대가다. 나처럼 물량이 많은 고객은 좀 특별하게 대접받는다는 느낌을 티나지 않게 전해준다. 세탁 대금이 일정액을 넘어서면 슬쩍 깎아도 주고, 좋은 옷은 좀 늦더라도 완벽하게 손질해 배달한다. 날 제일 감동시키는 건 수금 자세. 2,000원을 받아도 반드시 두 손으로 허리를 90도 각도로 꺾으며 감사를 표시한다. 아무리 싸고 잘하는 세탁소가 새로 문을 열어도 그를 감히 배반하지는 못할 것 같다.

작은 이익을 노리다 큰 것을 잃는다, 고객의 마음을 읽어라, 남다른 서비스만이 살 길이다…. 마케팅 교과서에 나오는 원칙들은 동네 상가에도 시퍼렇게 살아있다. 정말 무섭지 아니한가.

이덕규(자유기고가·)boringmo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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