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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40)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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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40)이별

입력
2003.0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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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7억5,000만원이었다. 검찰로부터 수사결과를 통보받은 국세청이 모나미가 탈루한 것으로 판단되는 법인세 등 7억5,000만원을 내라고 통보해왔다. 너무나 엄청난 액수에 모두들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모나미 자본금이 5억원이었다. 그만한 추징금을 낼 여력이 모나미에는 없었다. 또 탈세 사건이 언론에 보도돼 주가마저 폭락한 상태였다. 불에 기름을 붓듯 거래 은행들은 자금을 회수할 태세까지 보여 거래 은행에 손을 내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임원 회의를 소집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추징금 납입 기간 만기가 바짝 코앞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사원 임금 등 고정비 지출 시기까지 겹쳤다. 회사가 궁지에 몰리고 있던 어느 날 보석으로 풀려나 집에 있던 사장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사태 해결의 돌파구가 될 비책이라도 내놓을까 싶어 일말의 기대감을 안고 찾아간 내게 사장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결심을 통보했다. 모나미의 지분을 모두 포기하고 경영에서 손을 떼겠다는 것이었다.

"송 부사장, 나는 모나미를 포기할 생각이요. 그리고 회사를 정부에 헌납하기로 결심했소. 송 부사장도 아다시피 추징금을 낼 돈이 없으니 다른 방법이 없지 않소. 현물로 대납할 수밖에…. 신중히 생각한 끝에 내린 결정이니 송 부사장도 그리 알고 내 결정에 따라 주시오."

나는 아무리 사장이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라 해도 결코 그것 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사장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모나미가 어떤 회사입니까. 사장님과 제가 공덕동 창고에서 새우잠을 자며 일으켰습니다. 온갖 모진 풍상 다 이기고 우리나라 문구업계 1위 업체로 키워낸 회사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쉽게 포기한단 말입니까. 지금도 공장에서는 1,000여명의 직원들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나미에 꿈과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 때문에 오늘의 모나미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눈물 어린 호소에 마음이 흔들렸는지 사장은 "피곤하다"며 내 눈길을 피했다. 나는 "내일 다시 오겠다"고 인사를 한 뒤 일단 사장 집을 나섰다. 사장은 10여년동안 투병 생활을 하면서 무척 쇠약해져 있었다. 창업 시절의 그 강인했던 투지는 사라지고 없었다. 눈앞의 고난을 헤쳐나가겠다는 의지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튿날 결정 철회를 다시 요청하는 내게 사장은 "나는 더 이상 모나미에 미련이 없다"며 "나는 연필회사 경영에만 전념할 테니 모나미는 송 부사장이 알아서 처리하라"고 말했다. 당시 사장은 나와 공동 경영을 하고 있던 모나미 외에 개인 명의로 연필 제조업체 등 2개 회사를 더 소유하고 있었다. 나는 '다른 회사를 경영할 생각이 있다면 모나미를 못살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 그러시다면 잠시 일선에서 물러나 회장이나 고문으로 계시면서 회사 재건 작업을 도와 주십시오."

사장은 "가족회의를 해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말에는 힘이 실려있지 않았다. 다음날 사장은 예상한대로 "결심한 대로 모나미에서 손을 떼겠다. 나머지는 송 부사장이 알아서 처리해 달라"면서 자신이 갖고 있던 모나미 주식을 모두 내게 넘겨줬다. 시가로 따져 보아도 몇푼 되지 않는, 그야말로 휴지 조각에 불과한 주식이었다. 마지막까지 그의 역할을 기대했던 나는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회사로 돌아온 나는 임원 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 사장이 삼고초려(三顧草慮)에도 불구하고 회사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는 소식을 전했다. 모두 말이 없었다. 아니 할 말이 없었다. 회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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