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게일릭호 사탕수수 노동 이민자들을 출발점으로 시작된 초기 하와이 한인 이민사회는 이로부터 10여년 뒤 제2의 한인 이민 물결을 맞는다. 사진 속의 예비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미지의 땅을 찾아 나선 '사진신부'들이 바로 그들이다. 대략 1910년부터 동양인 이민금지법이 발효된 1924년까지 사진 하나만을 들고 하와이로 건너온 사진신부들은 총 950여명에 달한다.사진신부들이 하와이서 겪은 고난과 애환은 단지 낮선 땅에서 살아가야하는 이민자들로서의 그것보다 훨씬 더한 것이었지만 그만큼 사진신부들이 하와이 이민사회에 끼친 영향도 대단한 것이었다. 만약 사진신부들이 없었다면 하와이 한인사는 노동이민 1세대에서 끝나버렸을 거라는 견해도 있다. 노동 이민선을 타고 건너온 초기 사탕수수 노동자들이 하와이 이민역사의 씨를 뿌린 시조들이었다면 제2의 물결을 이룬 사진신부들은 하와이 한인사회를 성장·발전시킨 하와이 이민사의 '모태'였던 것이다.
하와이 이민사에 사진신부의 등장은 필요의 산물이었다. 사탕수수 노동 이민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던 당시 한인사회는 남녀의 불균형이 극심했다. 1910년 당시 하와이내 14세에서 40세 사이 한인 남녀의 비율은 무려 13대1에 달했다. 당시 한인 노동자들은 한국에서부터 가족을 데리고 온 가장들을 제외한 대부분이 혼기를 넘긴 총각들이었다.그런데 이들의 상당수가 노동의 고단함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술과 도박 등에 의존하기 일쑤여서 이는 당시 한인사회의 큰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농장주들과 목사들이 나서 한국의 규수들과 사진 중매를 추진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사진신부는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지역에서 주로 모집됐다.
사진신부들의 애환은 생면부지의 배우자감을 만나기 위해 이역만리 낯선 땅을 찾아나서야 하는 상황에서 비롯됐다. 사진 속의 예비신랑과 이국 땅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안고 하와이행 배를 탄 사진신부들을 기다리고 있던 현실은 그들의 생각과는 전혀 딴판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1903년에서 1905년 사이에 하와이로 건너왔던 예비 신랑들은 사진신부를 맞을 당시는 이미 중년에 접어든 나이였지만 이들이 예비 신부를 위해 보냈던 사진은 실제보다 젊은 모습인 경우가 대다수였다.
사진신부 등 하와이 이민사를 집중 연구해 온 하와이대 역사학과의 최영호(71) 교수가 전해주는 한 사진신부 할머니의 경험담은 당시 사진신부들이 처했던 상황을 잘 말해준다.
"사진 하나만 달랑 들고 호놀룰루 항구에 내려 마중나온 예비신랑편을 찾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사진 속의 얼굴 같은 사람이 없는 거야. 그러다가 갑자기 어떤 사람이 손목을 덥석 잡으며 '여보' 하는데 그 사람 얼굴을 쳐다보자마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어. 아버지 같은 사람이 내 남편이라니 기가 막혔지." 이같은 상황에서 사진신부들은 대부분 도망을 치려 하거나 몇 달씩 결혼생활을 거부하고 버틴 경우도 있었으나 결국에는 대부분 체념하고 결혼생활에 적응하게 된다.
물론 생면부지의 신랑과 원만하고 행복하게 결혼생활을 영위한 사진신부들이 더 많았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서 하와이 한인사회의 한 부분을 이루게 된 사진신부들은 당시 하와이 한인사회의 사회·경제적 발전의 토대로 작용해 한인 이민사의 발전에 매주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최영호 교수는 "사진신부들이 가세하면서 한인가정을 형성하게 돼 한인 이민사회가 안정을 찾게됐고 한인 2세를 생산, 한인사회의 맥을 이었을 뿐 아니라 2세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이들이 주류사회에 진출하는 토대를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또 사진신부들은 하와이에 도착한 후 농장 일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바느질이나 빨래일, 또는 독신 노동자들을 위한 하숙업 등을 하며 여성 노동력 공백을 메우게 됐고 이들의 노력으로 한인사회가 차차 경제적 기반을 잡아갔다. 이와 더불어 일제의 식민통치가 공식화되기 이전에 한국을 떠난 사탕수수농장 이민자들과는 달리 1910년대 이후에 하와이로 건너온 사진신부들은 일제의 폭압에 대한 정보를 그대로 전해 하와이 이민사회에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하와이의 총 인구 중에서 한인이 차지한 비중은 2, 3% 정도에 불과했지만 한인 후손들의 전문직과 주요 공직 진출은 상대적으로 많았다. 한국인들의 미국 대량 이민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기 전인 70년대 초 하와이 한인 2세들의 교육수준과 개인소득이 하와이의 여러 소수계 후예들 중에서 제일 높아 가장 성공한 민족집단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이 역시 헌신적인 희생으로 자녀 교육을 실천한 사진신부들의 공헌이라는 분석이다.
이민 100주년을 맞은 지금 그 고난의 역사와 애환을 생생히 들려줄 생존 사진신부는 이제 더 이상 하와이에 존재하지 않는다. 근래까지 사진신부들 중 유일한 생존자로 '마지막 사진신부'로 알려진 유분조 할머니는 한인 이민사의 100돌을 채 맞지 못하고 지난해 초 10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하와이 한인 이민사회의 형성과 발전에 끼친 사진신부들의 기여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새로운 100년의 역사를 여는 미주 한인사회 전체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하와이=특별취재반
■ 100세 맞은 "사진신부"딸 정태임 할머니
현재 하와이에 생존한 사진신부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지만 초창기 사진신부와 함께 이민 와 90여년의 애환을 또렷이 증언해 주는 할머니가 있다.
주인공은 이민 100주년을 맞은 올해 꼭 100세가 된 정태임 할머니(사진). 미국식 이름이 작고한 남편 성을 따라 마가렛 임인 그는 바로 '사진신부의 딸'이다. 정 할머니는 10세 때인 1912년 사진결혼을 통해 농장 노동자와 재혼한 사진신부 어머니를 따라 하와이로 건너온 말하자면 1.5세. 꽉 찬 100세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정한 정 할머니는 적확한 한국말로 사진신부 어머니의 고난과 한인 이민사회 100년의 기억들을 생생하게 들려줬다.
정 할머니가 이계순으로 이름을 기억하는 사진신부 어머니는 초혼에 실패하고 정 할머니 등 자녀들과 함께 살던 중 사탕수수 노동자 출신으로 한국에 재귀국한 오빠가 적극 추천, 32세의 나이에 사진신부로 하와이에 오게 됐다. 정 할머니의 모친은 사진결혼한 남편과 함께 파인애플과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게 됐는데 연약한 몸으로 힘든 농장 일을 견디다 몇년 지나지 않아 병을 얻어 곧 사망하고 만다.
그후 18세 때 결혼해 호놀룰루에서 군인들을 상대로 세탁업을 시작한 정 할머니는 하루 열서너 시간씩 중노동을 하며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생을 했다.
영어에도 능숙하던 정 할머니는 이때부터 어려운 한인들을 위해 서류작성과 통역 등의 일을 마다 않고 돕기 시작, 수십년의 세월을 지나며 지난 여름 실족으로 넘어져 골반 뼈가 부러져 요양원에 입원하기까지 남을 돕고 살았다.
호놀룰루에서 30여분 떨어진 카네오헤의 요양원 앞뜰에서 지난 세월을 회상하며 "어머니도 그랬지만 그때는 불쌍하게 사는 사진신부와 영어도 잘 못하고 고생하는 한인들이 많았다"고 설움이 복받치는 듯 울먹이는 정 할머니는 "다친 곳이 나아 요양원을 나가면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다시 한인들을 도우며 살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하와이=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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