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 문제가 출범을 앞둔 새 정부의 덜미를 잡고 있다. 노무현 당선자는 가뜩이나 취약한 외교안보 분야에서 초장부터 빙판에 올라선 형국이다. 자칫 낙상할까 움츠리다 보면, 진보적 이념을 표방한 대내적 개혁에도 주춤거리기 십상이다. 남북과 미국이 얽힌 외교안보 상황에 한파가 지속되면 민심과 정책의 균형이 다시 보수로 기울고, 실망한 지지계층이 이반(離反)하는 지경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이는 5년 전 DJ 정부가 환란의 질곡에 묶여 미국이 강요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매달린 것을 떠올리게 한다. DJ 정부는 그나마 햇볕정책으로 남북관계에 역사적 진전을 이뤘으나, 새 정부는 외교안보적으로 한층 큰 부(負)의 유산을 안게 됐다.
안팎으로 일대 전환을 감행할 정권 교체기마다 미국이 칼자루를 쥐고 버티고 선 것이 공교롭다. 그러나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고 지레 체념할 건 아니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이념적 지평과 정서와 역량이 크게 달라졌다. 변화가 못마땅한 세력은 한미간 냉기류에 '그 것 봐라'며 기꺼워할 것이나, 국제 관계에도 변화 기운이 넘칠 때 갈등과 균열이 생기는 법이다. 이럴 때 고루(固陋)한 안목으로 낡은 질서에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다. 변화를 바로 읽고, 새 질서를 주도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사태의 발단은 북한의 핵개발이고, 북한의 변화가 사태 해결에 관건처럼 돼 있다. 그러나 이번 핵 위기는 미국의 적대에 불만인 북한의 핵개발의지 표명을 '핵개발 시인'으로 몰아, 중유공급 중단 등 갈등을 조장한 미국이 주도한 측면이 있다. 따라서 미국의 의도를 냉철하게 헤아려야 한다.
미국의 전략적 의도는 두 갈래로 풀이된다. 첫째는 부시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한 DJ의 '뺨을 때린' 행태가 상징하듯이, 한반도 주변의 현상(現狀) 변경을 저지 또는 지연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는 미국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할 때 이미 동북아 질서 통제의 '꽃놀이패'로 삼았다. 필요하면 언제나 패를 띄워 긴장 국면을 조성해 기존 역학구도를 고수하는 동시에 확산되는 반미 정서와 미군철수 논의 등을 견제하는 수단이라는 진단이다.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을 누르기는 어렵다는 관측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강경자세를 고집하는 것은 바로 잃을게 없기 때문이란 풀이는 주목할 만 하다.
또 다른 갈래의 풀이는 이라크 침공 스케줄을 조정하는 데 북핵 사태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곧 대 이라크 전쟁을 단행할 태세지만, 2004년 재선에 유리한 시점을 택하기 위해 전쟁을 미룰 계산을 하고 있고, 이 공백기에 대량살상무기 확산 저지란 전쟁 명분을 살려놓기 위해 북한 핵 문제를 부각시키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꽃놀이패에 현혹되거나, 피상적 위기에 주눅들지 않는 의연함이다. 오히려 미국 민주당 쪽에서도 제시하는 북한문제 일괄타결과 주한미군을 포함한 한반도 전면 군축 등을 주도적으로 추진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 것이 지난해 거듭 확인한 자존과 자주 의식, 그 역량에 걸맞게 나라의 진정한 주인 행세하는 길이다.
지난해 이맘때, "2002년 임오년은 국운이 갈리는 해"라고 내다본 독립운동가 백용성 스님의 유훈을 소개했다. 강대국에 종속되느냐, 아니면 스스로 주인 행세하는 나라 되느냐의 기로에서 주인되는 선택으로 장구한 국운을 이어가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국운이 쇠잔한 시절 선각자가 남긴 말이지만 나라 안팎의 격동기에 귀 기울일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그 임오년에 우리는 민족 사상 유례없이 열렬한 애국적 기운이 떨쳐 일어나는 감동을 경험했다. 오랜 세월 우리를 속박한 변방 의식, 약소국 정서를 벗어 던진 그 감동은 든든한 자산으로 남아 있다.
강 병 태 편집국 부국장 btk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