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밤 10시, 경기 화성시 남양동 시청사 주차장. 검정색 바지에 검정색 방한점퍼, 워커까지 갖춰 신은 30, 40대 장정 10여명이 모였다. "어둡고 제법 푹하니 오늘 상황이 많이 생길 지 모르는데…, 자 서두릅시다." 두셋씩 6대의 4륜구동 지프승용차에 분승하자 지휘차 무전박스로 지시가 떨어진다. "'GP4(경기평택 4호차)'가 앞장서면 V1과 V4(서울 본부차)가 따르시죠. 경기 단원들이 차례로 뒤를 서고." 한국수렵관리협회 밀렵감시단의 새해 첫 합동단속이 시작된 것이다. 수렵 허가시즌인 11월∼2월 4개월은 밀렵감시단의 주요 활동기간이기도 하다. 그 중에도 이맘 때가 일년 중 가장 바쁜 시기. 경기지부 천병권(35) 상황실장은 "일주일 중 3,4일은 차에서 밤을 샌다"고 했다.
밀렵감시단은 올해로 출범 9년째를 맞는 전국 정회원 158명의 순수 민간기구. 사실상 전국의 모든 밀렵감시를 도맡고 있다. 이들 가운데 열에 아홉은 수렵인 출신으로, 밀렵꾼 횡포에 치를 떤 경험 한 두 번 정도 가슴에 묻고 사는 이들이다. 2000년부터 정부에서 연 6억원의 활동비가 나오지만 전국 11개 지역상황실 임대료 등 운영경비와 무전기 카메라 등 공용장비 구입비, 회원 상해보험료 충당하기에도 부족한 실정. 그래서 대부분 자기 차 가지고 나와 자기 돈으로 기름 넣고 밥 사먹으며 활동한다. 그들은 밀렵에 대한 적개심과 '총잡이들' 끼리의 의리 때문에 이 일을 한다고 했다.
차량들이 시 외곽으로 접어들자 지휘차량의 작전지시가 떨어졌다. 차량 2대씩 3개조로 편성된 뒤, 조별 순찰지역이 배정된다. A조는 천등산 방면, B조는 응봉산, C조는 용포리쪽이다. 시화호 주변의 들녘과 인근에 산재한 섬과 야산이 주된 순찰지역인 셈. 보안상 언제 어디로 나갈 지 작전 지휘자가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에는 묻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저기 앞에 가는 차, 냄새가 난다." "예, 나중에 만나겠죠." 자정이 임박한 시골 농로는 그야말로 칠흑이다. 지리가 상대적으로 어두운 V1차량이 소등한 채 시화호 제방 둑 위에서 '둥지를 트는(정차 잠복)' 동안 한 조를 이룬 GP4 차량이 호수 주변 순찰에 나섰다. 전조등과 차폭등은 물론, 계기판까지 검은 테이프로 붙여 불빛을 차단(등화관제)한 상태. 이제 가로등조차 없는 농로를 희미한 할로겐램프(일명 '도깨비등') 하나에 의지한 채 누벼야 한다. 오고 가다 마주치는 4륜구동 차량은 일단 용의차량. 멀리서 낯선 차량 전조등 불빛이 보이면 농로주변 골목에 숨었다가 불을 끈 채 멀찍이서 뒤를 밟는 형식이다. 길이 식별되냐는 질문에 한 대원은 "이 짓 4,5년 씩 하다 보면 모두 올빼미 눈이 된다"고 했다. 그 사이 간간이 몇몇 용의차량이 나타났다는 무전이 들어왔지만 확인 결과 모두 허탕.
"감시단 발족 첫 해(1995년1월) 무려 904명의 자원 감시단원을 선발했는데 그 해 밀렵으로 적발된 이들 대부분이 감시단원인 겁니다. 기가 막히더군요." 둥지를 트고 섰던 김철훈(48) 감시단장의 소회다. 그 해 전 단원을 해산하고 다시 선발했다고 했다. 그는 "해마다 소문이 안좋거나 작은 흠이라도 생기면 쫓아냈기 때문에 이제는 서로를 100% 믿는 최정예만 남은 셈"이라고 했다. 초창기 색안경을 끼고 보던 이들의 인식도 달라져 얼마 전 대통령 표창까지 받은 마당이니, 연말마다 여기저기서 상주겠다고 부르는 것도 귀찮을 지경이다.
새벽 1시를 넘기고 V4가 우유와 강냉이 등 '야식' 보급에 나설 즈음, 응봉산 쪽으로 나간 B조 차량에서 급전이 들어왔다. "영철이 눈떴다!"
'영철이'는 밀렵꾼을 지칭하는 감시단 내부 은어. 딸만 줄줄이 둔 한 고참 단원이 미리 지어 둔 아들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이라고 했다. '눈을 떴다'는 것은 밀렵꾼이 사냥감을 찾기 위해 서치라이트를 켰다는 의미다. 긴박한 무선 교신과 함께 산개했던 차량들이 기민하게 모여들고, 지휘차량의 교신을 따라 군도와 농로의 주요 길목을 차단했다.
그런데 아뿔싸. 시간을 벌기 위해 신분을 감추고 용의차량의 뒤를 밟던 감시단 차량이 '꼬리'를 놓쳤다는 무전. 눈치를 챈 용의차량이 거미줄처럼 얽힌 농로와 언덕길을 재빨리 꺾어 돈 뒤 시동을 끈 채 잠적해버린 것이다. 수색이 시작됐다. 멀리 차량 불빛을 본 이가 '아군 소등' 무전 지시를 내리고, 그 차의 불빛이 꺼졌다 켜지는 지 여부로 피아를 식별하는 식의 수색이 20여분 정도 이어졌을까. "용의차량 다시 출현, 추적 중"이라는 무전이다. 쌍방이 서로의 정체를 알아버렸으니 이제부터는 '선수들끼리의 승부'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밀렵꾼이 이 마을 주민이라면 지리에서 감시단이 밀리는 것은 당연한 일. 사강읍내로 도주한 용의차량은 시속 120㎞의 속도로 읍내 골목길을 종횡무진 누비며 다시 자취를 완전히 감췄다.
분을 삭이며 또 다른 '영철이'를 찾아 나서려던 즈음, 새벽 2시20분께 경기지부의 막내대원 은종배(33)씨가 사강 읍내 공용주차장에 서 있던 뒷 보조범퍼가 약간 휜 바로 그 무쏘 회색 용의차량을 발견했다. 운전자는 사라진 뒤지만 라디에이터가 채 식지 않았고, 뒤 트렁크 부분에 피가 채 마르지 않은 고라니 털이 랜턴 불빛에 모습을 드러냈다. 감시단 전 대원이 집결, 동물적인 감각으로 주차장 주변을 샅샅이 뒤진 결과 한 켠의 버려진 가구더미 밑에서 목과 가슴께 4발이나 맞고 숨진 수컷 고라니 한 마리와 이탈리아제 사바티 엽총 한 정, 20게이지 구경 실탄 11발을 찾아냈다. 20게이지라면 대부분 엽사들이 사용하는 12게이지에 비해 휴대가 간편해 숨기기 좋은 대신 명중률이 떨어진다. "총께나 쏘는 놈인데…." "아따 도주하는 솜씨 못봤어? 보통 놈이 아니야." 경찰에 고발조치하고 차적을 조회한 결과 범인은 역시 마을 주민이 낀 3인조로 확인됐다.
감시단 활동이 본격화하면서 총기 밀렵은 많이 줄었다고 했다. 이제 남은 밀렵꾼은 그야말로 '프로'라는 의미다. "지능적이고 악랄해서 추적 도중 사고가 나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생합니다." 아예 밀렵감시단 차량 무전을 도청하는 지능범도 있다고 했다. 작대기(공기총), 대포(엽총), 둘둘이(22구경) 등 은어들이 많아진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상황이 종료된 뒤 지역본부 상황실이 있는 경기 평택으로 철수한 시간이 3일 오전 5시30분. 뼈다귀해장국에 소주 한 잔으로 긴장한 속을 푸는 시간이다.
이학도(39) 단원은 이 날 낮 강원 홍천에서 올린 올무꾼 단속담을 꺼낸다. "제보받고 들이닥쳤는데 집 주인은 올무가 뭔지도 모른다는 거야. 집을 뒤졌더니 토끼올무서부터 멧돼지 잡는 와이어올무, 창애(덫의 일종)까지 무려 300여 점이 나오더구만. 결국 냉동실에서 얼린 토끼랑 고라니 고기를 찾아냈제." "그려, 총보다 올무가 더 큰일이여. 만들어 놓기도 쉽고, 한 번 놓아두면 한 마리가 죽어나가야 입을 다문 게 말이여."
"올무 수거는 짐승 다니는 길을 아는 밀렵꾼과 사냥꾼만 할 수 있는데 사냥꾼은 수렵장 허가가 안난 곳은 아예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니 뭔 법이 그래." "맞아, 올무 밀렵꾼이 총맞으려고 허가 난 수렵장에 들어가나. 허가 안 난 엽장은 올무꾼 판이라니까."
덜 채운 술 배에 입맛 다시며 나선 신새벽 거리에는 엄지 손톱만한 서설이 흩날리고 있었다. "오늘 눈이 왔으니 내일이나 모레부터 또 한 동안 바빠지겠구만."
/홍천·화성=글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사진 홍인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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