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은 무자료 거래에 의한 탈세를 집중 조사했다. 검찰은 이미 모나미의 수입대행사인 A사를 압수수색해 관련자료를 확보해 놓고 있었다. 당시 모나미는 A사를 통해 사인펜 끝에 장착하는 닙(Nib)을 전량 수입하고 있었다. 회사 내에 무역 부서를 따로 둘 수 없었던 당시 대다수 기업들은 필요한 원자재 등을 수입할 때는 수입대행사를 이용해야 했다. 모나미도 마찬가지였다. 닙은 국내 기술로도 제작이 가능했지만 개발 비용 등을 감안하면 수입하는 편이 훨씬 쌌다. A사는 일본으로부터 닙을 수입해 주고 수입 액수에 따라 계약한 수수료를 받았고, 모나미는 A사가 수입한 닙을 받아 사인펜을 제작한 뒤 도매상에 판매했다.문제는 바로 그 부분, 즉 모나미와 도매상간 무자료 거래였다. 당시 대부분 비상장 업체들에게 있어 무자료 거래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모나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것은 모나미를 위해, 또 모나미와 거래하는 도매상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거래 관행이었다. 그러나 그런 업계의 관행이 이렇게 모나미의 발목을 잡게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탈세가 목적이었다면 그렇게 허술하게 관리하진 않았을 것이다.
검찰은 A사를 압수수색해 수입면장과 거래장부 등을 확보, 최근 수년간 수입한 닙의 수량을 파악한 뒤 모나미의 장부와 대조했다. 사인펜 닙을 사용하는 회사는 모나미 밖에 없었으니 A사의 닙 수입량은 곧 모나미의 판매량이나 마찬가지였다. A사의 장부와 모나미의 장부는 당연히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조사는 날이 어두워지면서 조금씩 마무리돼 가는 듯했다. 담당 검사와 수사관들이 분주히 조사실을 오가기 시작했다. 밤 10시쯤 조사를 맡았던 검사가 내게 "송 부사장은 운이 좋은 것 같다"면서 "아마 조금 있다 나갈 수 있을 것 같다"고 귀띔해줬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시 조사를 받던 경리부장의 양복 안주머니에서 비밀 전표 한 장이 나왔는데, 여기에는 사장과 경리부장 도장만 찍혀있었다. 당시 나는 부사장으로서 사장과 함께 모나미의 공동 경영을 맡고 있긴 했지만 모든 회사 서류의 최종 날인은 사장의 도장을 사용하고 있었다. 검찰은 회사 서류와 장부를 다 뒤졌지만 결재란에 사장과 경리부장 도장만 사용됐는데다 사장과 부사장을 모두 구속할 경우 기업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나는 석방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사장에게는 죄송했지만 회사를 위해서는 그야말로 천우신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석방되자마자 정부 고위직에 있는 친구에게 연락해 사장이 석방될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를 문의했다. 하지만 그 친구로서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다만 검찰에 있는 지인을 통해 모나미 사장의 건강 상태를 감안, 최대한 편의를 봐주도록 부탁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튿날 사장이 구속됐다. 그리고 언론에 모나미의 탈세 사실이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모나미의 주가는 대폭락 했고 주식은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모나미의 주식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회사로 몰려와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예상한 일이었고 또 회복할 수 있는 문제였다. 회사가 다시 일어서기만 하면 주가는 또 오를 수 있는 것이었다. 당장의 문제는 주가가 아니었다. 우선 사태 수습을 위해 사장이 풀려나야 했다. 대주주인 그가 영어의 몸으로 있는 한 일련의 사태 수습은 불가능해 보였다. 나는 법원에 건강문제를 이유로 사장에 대한 보석을 신청한 뒤 탄원서를 제출했다. 다행히 사장은 얼마 가지 않아 석방됐다. 그러나 사태는 끝나지 않았다. 회사의 존폐가 달린 위기는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