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지나온 날을 되돌아 보면 인생의 전환점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삶의 흐름이 바뀌고 삶의 철학이 변하는 시기가 있기 마련이다. 1974년은 내게 그런 운명적인 시기였다. 그 한 해 동안 나는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굵직굵직한 사건들에 부닥치면서 절망을 느껴보기도, 새로운 희망을 가져보기도 했다. 그 해 6월에 있었던 모나미의 기업 공개가 좋은 예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곧이어 나는 그보다 몇십배 더 고통스런 시련을 견뎌내야 했다.74년 10월로 기억한다. 모나미는 당초 우려와 달리 전화위복의 효과를 가져온 기업 공개 이후 그야말로 욱일승천의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기업공개는 원치 않던 일이었지만 모나미는 어쨌든 기업이 더욱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셈이었다. 게다가 모나미 제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애정은 도·소매상들에게 모나미에 대한 인식을 확고히 심어놓는 계기가 됐다.
당시 모나미는 한국은행 건너편 회현동 제일은행 본점 뒤 구 광신산업 건물을 본사 사무실로 쓰고 있었다. 그날도 나는 공동 경영인인 사장, 전무 등과 함께 판매 관련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때 '꽝'하고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함께 일단의 사내들이 사무실 안으로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곧이어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사람이 "검찰에서 나왔으니 일체 서류에 손대지 말고 현재 상태 그대로 있어라"고 고함을 질렀다.
어안이 벙벙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검찰이라니, 검찰이 왜 여기에‥.'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 사내는 다시 "여기 사장이 누구냐"고 물었다. 내가 나서서 옆에 있던 공동 경영인을 가리키며 "이분이 사장님이시고 제가 부사장입니다만"하고 말하자 그는 대뜸 "같이 좀 가야겠다"며 부하들을 불렀다. 나는 "사장님은 지금 몸이 매우 불편하신 상태인데 일단 나만 가면 안되겠느냐"고 부탁했다.
실제로 공동 경영인은 1964년경 혈압으로 한번 쓰러진 뒤 3년 가량 치료를 받았지만 완치가 되지않아 계속 병원을 오가고 있던 차였다. 병세가 호전되긴 했지만 아직 거동도 불편했다. 하지만 그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결국 공동 경영인과 나, 그리고 경리부장 3명이 검찰청으로 연행됐다. 그 시각 성수동 공장에도 검찰 수사관들이 들이닥쳐 각종 서류를 압수해가고 있었다.
문제가 된 것은 다름 아닌 무자료 거래, 즉 탈세였다. 6월 모나미의 기업 공개 당시 모든 거래자료의 공개 때문에 도매상들이 모나미 제품을 외면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나는 또다시 무자료 거래가 문제되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러나 이번 만큼은 사정이 달랐다. 기업 공개야 그로 인한 물질적 피해만 입으면 그만이었지만 검찰 수사는 결과에 따라서는 구속 등 형사 처벌도 받을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이었다. 죄를 지었다면 처벌을 받아야 하겠지만 공동 경영인과 나 둘중 한 사람 만큼은 구속을 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회사를 구할 수 있었다. 두 사람 다 회사에 없으면 모나미는 문을 닫아야 했다. 무슨 수든 써야 했다. 수사관에게 연행되기 직전 나는 직원들에게 학교 동창인 정부 고위 인사에게 전화를 걸어 연행 사실을 알려주라고 지시했다. 그 친구가 연행 이유를 알아보게 되면 최소한 몸이 불편한 사장이나 내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신체적, 정신적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사건이 의도적으로 부풀려지는 등의 불이익은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장과 나, 경리부장 등 3명이 서울지검에 도착한 것은 정오가 다 될 무렵이었다. 우리들은 격리된 채 본격적인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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