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14일 저녁 학교 친구들과 함께 광화문에 갔다. 여름엔 시청 앞 월드컵 인파 속에 있었는데 이번 촛불시위는 내게 그에 못지 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몇십만명의 사람이 함께 촛불을 들고 모인 모습이 장관이었다. 월드컵 당시의 응원 인파가 떠올랐다. 한국인이 모여 생성하는 에너지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웅장했다. 인파 속에서 아리랑을 들으면 흥분인지 원한인지 아니면 통쾌함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번에도 아리랑이 흘러나왔다. 월드컵 때와 같은 신나는 리듬은 아니었지만 원한과 끈기, 그리고 힘이 느껴져 마음이 벅찼다. 격동의 시대를 지나 온 이 민족이 오늘 날까지 살아오는 데는 얼마나 많은 끈기가 필요했을까. 위기 앞에 하나가 되어 폭발하는 이러한 에너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중국 친구들은 내게 간혹 "나라를 위해 자기 금(金)을 내어놓는 민족이 대체 어떤 민족이냐"고 묻는다. 그날 저녁 나의 옆에서 어깨를 안고 껴있던 젊은 연인, 큰 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던 40대 아줌마, 흩어질까 봐 팔짱을 끼고 있는 동료들, 그들의 눈빛을 중국 친구들에게 보여주었다면 한민족의 비밀을 이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파가 세종로로 이동하자 다시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일면식도 없는 생면부지의 사람들끼리 서로를 걱정하며 주의를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계단을 조심해요" "빨리 가면 앞 사람들이 밀려요" "촛불 조심해요" 등등. 갑자기 추운 겨울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 동안 한국인은 흥분하기 쉽고 과격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감정을 자제하며 힘을 모아 자기의 주장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나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 아이를 학원에 보내지 않고 촛불시위에 함께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는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2002년 한국에서 나는 여름의 월드컵, 겨울의 촛불시위로 두 번 감동 받았다. 2002년 한국인은 모두 함께 하나가 되면 얼마나 큰 힘이 되는가를 보여 주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스스로의 힘을 확신하게 된 것, 즉 자신감을 획득한 것이 가장 중요한 변화일 것이다. 한국이 2003년에도 분열과 갈등 대신 화합을 택한다면 더욱 활기차고 자랑스러운 한 해가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왕샤오링 중국인 경희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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