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가 한창이던 1998년 크라잉넛의 '말 달리자'가 30대 직장인을 포함한 많은 이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노래는 시름과 절망에 빠져있던 사람들을 선동하는 듯했다. 거칠고 빠르게 내닫는 기타와 드럼, 내뱉듯이 질러대는 단순한 멜로디와 보컬, '닥쳐! 닥치고 내 말 들어/우리는 달려야 해 바보 놈이 될 순 없어/말 달리자 말 달리자'하는 노랫말은 당시 가요계의 주류였던 댄스와 발라드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유쾌함과 통쾌함을 안겨주었다.당연했다. 크라잉넛은 홍대 앞 클럽가의 인디 밴드였다. 90년대 중반부터 클럽이 들어선 홍대 앞은 주류 문화를 거부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의 해방구였다. 크라잉넛의 근거지인 드럭은 94년 문을 연 얼터너티브 록과 펑크 전문 클럽으로 95년 4월부터 아마추어 밴드 공연을 시작했다. 76년 동갑나기 한동네 친구들로 "90년대의 얼터너티브 록에 빠져 있던" 쌍둥이 이상면(기타) 상혁(드럼)과 한경록(베이스) 박윤식(보컬)이 모인 크라잉넛도 그 중 하나였다.
드럭의 밴드들은 70년대 영국 펑크 밴드를 본으로 삼았다. 단순한 연주, 파괴적인 에너지, 반항적인 메시지 같은 음악적 특성 뿐 아니라 기성 대중음악 질서에 맞서 독립적으로 음악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인디 방식'을 꿈꿨다. 96년 기획사를 차린 드럭은 첫 인디 음반 '아우어 네이션'을 발매했다. 뒤이어 인디 기획사와 밴드들이 속속 결성되면서 '인디계'가 형성되었지만 음반은 누구도 1만장을 넘지 못했다. 크라잉넛은 고민 끝에 가요계 진출을 결심했다. 드럭 이석문 사장은 "펑크 원론주의에 매달려 있던 우리가 한국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제작 방식은 그야말로 인디였다. 작사 작곡 연주 프로듀싱까지 멤버들이 직접 했고 뮤직 비디오도 클럽 공연 실황을 그대로 써 제작비는 단돈 1,000만원. 하지만 음악은 참신했다. 전시대의 록 밴드나 여타 인디 밴드들과는 달리 크라잉넛에게 음악은 더 이상 존경이나 과시의 대상이 아니었다. 즐거움이었다. "일단 하는 사람부터 신나야 했다." (이상면) 기준은 잘하든 못하든 자신들. "저항과 자유, 솔직함 같은 정신은 받아들이되 펑크의 틀에 갇히긴 싫었다"는 한경록의 말처럼 자기식의 해학적 펑크를 만들어냈다. 길거리의 악동들 같은 멤버들도 제멋대로였지만 귀여웠고 신인이면서도 오락 프로그램이나 립 싱크는 사절한다는 배짱을 관철시켰다. 음반은 2집 '서커스 매직 유랑단'(99)과 드럭의 DJ였던 김인수(29)를 받아들인 3집 '하수연가'(2001)도 소프트 록 '밤이 깊었네'가 히트하며 내리 10만장을 넘겼다.
크라잉넛을 두고 인디계에서는 "변절자"라 비난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크라잉넛을 계기로 인디와 기성 가요계는 비로소 진정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소수의 음악이었던 인디는 대중의 관심을 얻게 되었고 홍대 앞 클럽가는 음악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매너리즘에 빠진 기성 가요계는 물론 90년대 이래 침체했던 한국의 록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 넣을 유일한 대안으로 떠올랐다. 방송을 하면서도 클럽 공연을 거르지 않은 크라잉넛은 인디와 주류를 아우르는 첫번째이자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꼽힐 만하다.
/김지영기자 koshaq@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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