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핵 문제 해결의 전제조건으로 미국에 불가침조약을 요구하고 있다. 북한의 이 요구는 우라늄 농축계획이 불거져 북미간의 새로운 갈등이 생긴 후인 작년 10월 25일 외무성 대변인의 성명에서 나온 후 끈질기게 반복되고 있다. 불가침조약은 전에 없던 주장이다. 많은 사람들이 핵을 포기하겠다는 데 못 들어 줄 일도 아니지 않느냐고 생각하고 또 여러 전문가들이 이에 동조하고 있다. 북한은 불가침조약을 이슈화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순수하게 해석하면 북한의 불가침조약 주장은 부시 정부에게 '악의 축'의 명단에서 빼 달라는 요구이다. 즉 체제위기를 느끼는 북한이 핵 개발을 양보하는 대신 미국으로부터 침공하지 않겠다는 담보문서를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북미관계를 면밀히 검토해 온 전문가들은 북한이 그동안 주장해 왔던 미국과의 평화협정의 전단계로 이 제의를 했다고 본다. 북한은 정전협정을 대체할 평화협정을 주장해 왔지만, 그 주장이 미국에게 먹혀들지 않자 중간단계로서 불가침조약을 들고 나왔다는 것이다.
■ 불가침조약하면 1939년 히틀러와 스탈린체제 간에 체결했던 독소(獨蘇) 불가침조약이 유명하다. 이것은 히틀러가 동구에 대한 소련의 불안감을 일시 해소해줌으로써 2차 대전을 유리하게 개전하기 위한 사기술책이었다. 오늘날같이 경제협력과 교류가 일상화되는 세계화 시대에 불가침조약은 역사의 유물이 되어가고 있다. 다른 나라와 불가침조약을 맺어본 적이 없는 미국이 북한의 요구를 들어줄지는 의문이다. 불가침조약 체결은 주한미군의 지위 등과 연관하여 북한의 전술적 정치적 카드가 될 터이므로 미국이 싫어할 것이다.
■ 사실 1994년에 체결된 북미간 제네바 합의는 불가침조약에 버금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합의문은 미국이 핵무기 불위협과 불사용을 보장한다고 규정했고, 더불어 북미간의 단계적 관계정상화를 추구하기로 약속했다. 정치적 군사적 보장을 넘어 북한에 중유를 제공하고 국제콘소시엄을 조직하여 2기의 원자력발전소를 짓고 있었다. 제네바 합의든 불가침조약이든 중요한 것은 신뢰다. 40년 전 미국을 최대의 안보위기로 몰아넣었던 쿠바의 카스트로정권이 미국의 코앞에 붙어 있지만 아직도 무사하다. 어쨌든 북한이 원하는 불가침조약은 사태해결의 키워드인 것은 분명하다.
/김수종 논설위원 sj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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