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우리 고전문학을 전공하는 미국 유학생이 대학신문에 '그리운 반미감정(?)'이라는 글을 써 화제가 됐다. 서반석(미국명 피터 슈로퍼)씨는 1986년 한국에 처음 왔을 때, 학생들이 '양키 고 홈'을 외치고 그려놓은 성조기를 밟고 다니게 해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는 대학생이 늘 옳을 수만은 없으나, 건설적인 고민으로 가득찬 대학시절을 만들어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국어와 상식보다는 철학책과 소설이 잘 읽히던 시절, 나는 때로 욕을 먹었지만 그런 문화가 그리웠다. 때로는 극성을 부리던 반미감정이 그립기까지 하다.>■ 반미행동이 수그러지지 않고 있다. 여중생 사망사건이 채 수습되기도 전에 영화 '007 어나더데이'가 상영돼 반미감정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시민단체들은 지난 연말에 이어 11일 145개 극장 앞에서 '007…' 상영반대 캠페인을 펼친다. 이들은 이 영화가 민족을 비하하고 한반도 현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뉴욕타임스 2일자는 한국 신문보다 더 객관적이고 자세히 우리 젊은이의 거부반응을 보도하고 있다. 제목은 '영화의 위력: 한국인을 단결시키는 본드'. 여기서 '본드'는 007 제임스 본드와 접착제를 동시에 가리키는 것 같다.
■ 거대한 파도를 타고 제임스 본드가 북한 해변에 야간 잠입하는 장면에서 시작되는 이 영화는 007 영화 특유의 다채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최신형 무기들과 아카데미상 수상자 할 베리를 비롯한 본드 걸, 아이슬란드의 얼음궁전 등이 화려함으로 눈길을 끈다. 그러나 남북한의 모습은 우리의 상식과는 너무나 어긋나고 과장돼 놀라울 뿐이다. 무서운 화력을 뿜는 북한 최신형 병기들과 북한군의 잔인성, 온갖 고문, 강경론자인 대령 아들이 온건한 장군 아버지를 죽이는 반인륜성 등은 지금까지 007 영화의 맥을 훨씬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 영화 속의 한국은 30년 전쯤처럼 궁핍해 보이고, 북한은 미국과 당당히 맞설 만한 군사력을 지닌 위험한 국가다. "영화산업은 정치와 관련이 있다"고 뉴욕타임스가 한국 젊은이의 말을 인용했듯이, 이는 자연스레 부시 미국 대통령의 북한에 대한 '악의 축' 발언을 연상시킨다. '007 어나더데이'는 개구리연못에 돌을 던지는 소년 같다. 영화는 재미로 돌을 던지지만, 남북한은 개구리처럼 위험을 느낀다. 서반석씨는 이런 감정을 이해할 것 같다.
/박래부 논설위원 parkrb@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