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배냐 성장이냐.' 이는 지난 대선에서 뜨거운 쟁점중의 하나였다. 성장과 분배의 균형 그리고 복지를 강조한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지금 한국에서는 분배와 성장의 관계를 둘러싼 이슈가 새삼스럽게 떠오르고 있다.동전의 양면같은 관계
'성장 없는 분배'는 정체경제 상태에서 고정된 국민소득의 분배를 둘러싼 계층간 갈등을 크게 증폭시킬 수 있다. 따라서 인구가 증가하고 일자리가 늘어나야 하며 소득향상 욕구가 강한 사회에서는 성장 없는 분배를 사실상 생각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분배 없는 성장'도 상정할 수 없다. 성장의 과실을 사용자들이 독식하여 노동자들에게 임금인상으로 분배되지 않는다면, 결국은 수요부족과 과잉생산으로 인한 경제침체가 초래되고, 부익부 빈익빈으로 인한 사회갈등이 심화되어 성장이 지속가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활동 인구의 거의 대다수가 임금노동자인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거시경제적 순환의 지속과 사회통합의 유지라는 필요성 때문에 성장과 분배는 어떤 방식으로든 연계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성장쪽에 더 기울어진 경제와 분배에 더 무게중심을 두는 경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성장을 중시하는 경제에서는 기업이 생산한 부가가치 중 더 많이 투자하고 노동자들에게 보다 적게 분배하려고 할 것이며, 사회복지 지출도 가능한 한 줄이려 할 것이다. 이러한 경제에서는 노동자들의 삶의 질이 정체되거나 악화하는 가운데 당분간 성장이 계속될 수 있다.
그러나 저임금을 받아 생활고에 시달리고 자기개발의 여유가 없는 노동자들로부터 생산성과 품질향상을 위한 적극성과 창의성 발휘를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경제는 장기적으로는 성장이 둔화되고 침체에 빠지게 된다.
분배에 더 무게 중심을 두는 경제는 경제성장을 둔화 시킬 수도 있고 촉진할 수도 있다. 고생산성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고임금이 지급되면 고비용-저효율로 인해 기업의 수익성이 떨어져 투자가 위축되고 경제성장이 둔화할 수 있다. 이처럼 경제성장이 둔화하면 고임금 지급이 불가능하게 된다. 여기서는 성장과 분배간에 상충관계가 성립한다.
이와는 반대로 분배의 개선은 성장을 촉진할 수 있다. 대량생산 경제에서 고생산성에 상응하여 고임금이 지급되면 노동자들의 대량소비가 나타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결합되어 지속적인 고성장이 가능하다. 고성장은 다시 고임금을 가능하게 한다. 이 경우에는 성장과 분배 사이에 선(善)순환 관계가 형성된다.
2차대전 이후 30년 동안 서구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이 누린 '황금시대'는 바로 이런 성장과 분배간의 선순환 관계의 산물이었고, 한국에서 1987년 노동자투쟁 이후 고임금에도 불구하고 10년 동안 지속된 고성장은 상당 정도 고임금이 초래한 대량소비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성장과 분배간의 선순환 관계가 지속되려면 임금 상승이 생산성 상승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만약 임금이 상승해도 생산성 상승이 그것에 따라가지 못하거나 심지어 둔화한다면 기업의 수익성이 저하되어 경제가 침체할 수 있다. 70년대 중반 이후 80년대까지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이 겪은 경제위기는 주로 이런 요인에 의해 초래되었다.
복지는 지식창출 기반
21세기 지식기반 경제에서는 분배의 개선과 복지의 향상이 경제성장의 새로운 원천이 될 수 있다. 고임금과 고복지는 노동자들의 지식과 숙련을 향상시켜 고부가가치 창출을 가능하게 하여 높은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기반 경제에서 성립하는 성장과 분배간의 이러한 새로운 선순환 관계를 인식하게 되면, 60, 70년대와 같은 대중기만적인 '선(先)성장 후(後)분배' 정책은 시대착오임이 분명해지고 '성장이냐 분배냐'하는 이분법적 논쟁도 부질없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김 형 기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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