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흰 눈은 서설이겠지요. 하늘에서 눈이 쏟아지지 않는다면 마음 속에서라도 흰 눈이 내려 잊고 싶은 일, 힘겨웠던 일, 무엇보다도 밉고 원망스러웠던 일일랑 모두 덮고 눈 덮인 산야처럼 백지에서 시작하고 싶습니다.하지만 출근길에 몇 개씩 큰 고개를 넘어야 하는 저는 눈 소식이 들리면 가슴이 덜컹 내려앉습니다. 눈이 아무리 많이 내려도 더러워진 도시를 씻어줄 것 같지 않은 불안감도 듭니다. 매일 매일 눈이 오기를 기다리는 초등학교 1학년짜리 딸아이를 보면, 흰 눈이 주는 기쁨도 그 마음의 깨끗함에 비례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제 자신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나무들에게, 풀들에게 눈은 어떤 존재일까요? 제 계절에 내리는 눈은 분명 숲 속의 식물들에게 아주 필요한 존재입니다. 추위가 가고 식물들이 새로운 움을 틔우기 시작하는 봄은 매우 건조한 기간입니다. 이때 겨우내 쌓여 있던 눈들이 조금씩 조금씩 놓으면서 식물들에게는 긴요한 수분 공급원이 된답니다.
눈은 추위를 막아주는 역할도 합니다. 눈이 완전히 덮여 있으면, 키 작은 식물들은 촉촉하고 아늑한 눈 속에서 매서운 삭풍을 피할 수 있습니다. 울릉도처럼 눈이 아주 많은 지역에서 같은 기온의 다른 지역에서보다 겨울을 나는 식물이 훨씬 많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영동지방에 쏟아졌던 눈처럼 눈이 너무 많이 내려 나뭇가지들이 휘어지고 부러지고, 더러 나무째 넘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숲 전체적으로 보면 긍정적인 면이 많습니다. 눈이 쌓여 부러진 가지들은 상대적으로 약한 가지일 것입니다. 쉽게 쓰러져 버린 나무들도 마찬가지구요. 빽빽한 나무 줄기들이 볕을 또는 양분을 가지고 경쟁하는 숲 속에서 눈을 통한 자연 도태는 숲 전체를 건강하게 만듭니다. 말하자면 자연적인 가지치기나 간벌과 같은 숲가꾸기를 하는 셈이지요.
설사 숲 전체 나무들의 생산력이 떨어졌다손 치더라도 쓰러진 나무를 터전으로 삼아 돋아나는 버섯들이 생겨나고, 숲의 빈 공간을 재빠르게 차지하는 키 작은 풀들도 있을 것입니다.
주말이면 강원도로 향하는 차량 행렬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스키장에서 미끄러지는 상쾌함도 좋지만, 나뭇가지마다 눈꽃이 피어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순결한 풍광을 만들어 내고 있을 산을 오르며, 자연의 이치처럼 조화로운 한 해를 설계해 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이 유 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ymlee99@fo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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