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엄격한 아버님의 교육을 받으며 7남매의 맏딸이라는 이유로 집안의 모든 일을 도맡아 했다. 고등학교 시절, 지금의 시아버님 눈에 띄어 철없던 스무살 나이에 시집와서 가문의 전통음식을 눈여겨보면서 나의 것으로 만들게 됐다.좌충우돌하며 살아가던 어느 날 큰아들에게 변고가 일어났다. 소아암인 골수성백혈병으로 투병하다 1988년 14세라는 나이에 하나님 곁으로 먼저 가버렸다.
바로 그 다음해 시어머님께서 병원으로부터 폐암3기라는 판정을 받았다. 병원과 약품에 한계를 느끼며 이른바 대체의학으로 시어머님과 함께 삶을 꾸려가면서 나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곧 쓰러질 것 같았던 당신은 다행히 특별한 병증없이 96년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사랑하는 가족으로 인해 고통은 받았지만 그것을 이겨내느라 동분서주했던 시간은 내 평생 잊지 못할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들을 잃고, 시어머님 병수발을 하면서 느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나와 같은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을 주고 비극을 예방토록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연유로 일상생활에서 흔히 마시는 차와 술을 전통 속에서 찾아 헤매게 됐다.
세계 어디를 가든 그 나라를 대표하는 술이 있다. 우리나라의 술은 약주다. 약이 되었기 때문에 약주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 치하를 거치면서 우리의 것은 대부분 사라졌다. 일본이 사카린, 아지노모도 등 인공첨가제로 우리의 술을 말살시켰던 것이다.
시어머님으로부터 배운 전통 발효주를 재현해 우리를 대표하는 것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전통 기법으로 인공첨가제를 넣지 않고 발효시켜야 한다는 것이 시어머님의 지론이셨다. 몸이 편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원칙과 정도를 주장하던 당신의 모습이 나의 직업관이며 기업관이 됐다. 그 고집을 되새기며 과학을 접목해 전통음식을 대량화하는 방법을 개발했고 특허까지 받았다. 내 가족,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먹고 마신다는 마음으로 좋은 재료만 고집했고, 어려웠을 때를 생각하며 고객에게 조금이라도 편안함을 주고자 공장 주변에 민속촌도 꾸며 놓았다.
지금 나의 자리는 한 집안의 맏딸, 맏며느리로서 온갖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내고 승화한 대가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을 때 그 슬픔보다 그들이 남겨준 사랑을 간직하며 실천하는 삶이 더욱 소중하다.
박 순 옥 억만장자식품영농조합법인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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