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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을 허문다](2) 광양 "평화를 여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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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을 허문다](2) 광양 "평화를 여는 마을"

입력
2003.0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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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우리가 서로 말 한마디를 해도 따시게 하는 디 뭔 일이 있겠습니꺼." 지리산 자락에서 출발한 물줄기가 전라도와 경상도 땅 사이를 굽이굽이 돌아 남해로 흘러드는 길목. 전남 광양시 다압면의 섬진강변 언덕배기에 자리잡은 '평화를 여는 마을'에 들어서면 다른 곳에서는 들어볼 수 없는 희한한 말투와 만난다. 영·호남 사투리가 절반씩 절묘하게 뒤섞인 신종 사투리다.1일 아침 새해 첫 햇살을 맞으며 마을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빗자루를 들고나와 집 주변을 쓸었다. 젊은이들은 금세 서로의 말투를 배워 앞서의 퓨전식 사투리를 만들어냈지만 어른들에게야 수십 년 익숙해진 고향 사투리가 쉽게 버려질 리 없다. 마을 형님이 진한 전라도 사투리로 힐난하면 아우가 곧바로 투정섞인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받아넘기는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아따, 쩌그 돌무더기 정리 좀 하랑께." "내사 우찌 혼자 한단 말입니꺼. 같이 와서 좀 도와주이소."

섬진강 너머 경남 하동군이 손에 잡힐 듯 보이는 이곳에 마을이 들어선 것은 2000년 9월. '사랑의 집짓기 운동본부'가 1,400여명의 자원봉사자와 함께 일을 시작한 지 5개월 만이었다. 집 없이 어렵게 살고 있는 주변 8개 시·군 거주자들로부터 신청을 받아 영·호남 각 16가구씩 모두 32가구 128명이 이웃이 됐다.

"아웅다웅 하며 살고 있제. 그냥 사람 사는 기 다 그렇제. 웃기도 하고 말쌈도 하고 그란당께." 전남 보성군 벌교읍 출신 김동호(金桐鎬·67)씨는 2년간의 평화마을 생활이 특별할 것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진주로, 대구로 옮겨 다니며 살았던 하성권(河成權·42)씨도 마찬가지. "정치하는 놈들이나 니편 내편 나누지, 우리는 그란 거 없심니더."

선거 때마다 몰아치는 지역갈등의 광풍도 이 마을은 비껴갔다.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하동에서만 9년을 살았다는 박정환(朴貞煥·31)씨는 "정책보고 찍지 지역보고 찍는 시대는 지났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하동 출신 부인 강순덕(姜順德·31)씨도 "어디 출신인지 우리는 그런 거 모릅니더"라고 맞장구를 쳤다.

집도 생기고 좋은 이웃들도 얻었지만 마을사람들은 걱정이 아직 많다. 생활권인 하동에는 큰 공장이나 공공시설이 없어 변변한 일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광양까지 나간다 해도 녹차 가공 공장이나 식당일이 고작이다. 그래서 주변에 큰 공장 하나 들어서는 게 새해의 제일 큰 소망이다. 마을 사람들은 11일 새해 잔치를 연다. 힘든 일상 속에서 함께 고생하는 서로를 챙기고 우애를 더욱 돈독히 하기 위해서다.

새해 청소를 마친 마을 사람들이 허리를 펴고 강바람에 이마의 땀을 식혔다. "쩌그 보이는 섬진강이 경상도 전라도를 하나로 이어주는 젖줄이제." "맞다. 맞다. 그러고 보면 다들 하나 아이가."

/광양=정상원기자 orno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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