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인 이동철 이희수 임상범 엮음 황금가지 발행·2만원'꿈★은 이루어진다'는 가슴 벅찬 화두를 남긴 2002년을 되짚어볼 때 제14회 부산 아시안게임이 안겨준 감동도 빼놓을 수 없다. 극적으로 성사된 남북한 동시입장, 북한 미녀응원단이 일으킨 '북녀 신드롬'도 잊을 수 없지만, 무엇보다 회원국 전체와 신생독립국 동티모르까지 총 44개국이 참가해 이 대회가 명실상부한 '아시아인 최대의 축제'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했다. 아시안게임을 창설한 사람은 누구일까. 인도의 정치학자이자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이었던 구루 두트 손디(1890∼1966)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직후 본격적인 근대화의 길에 들어선 아시아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첫 걸음으로 지역 스포츠대회의 필요성을 주창, 1951년 뉴델리 첫 대회를 성사시켰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붉은 태양이 그려진 대회 휘장과 '영원한 전진(Ever Onward)'이란 표어도 그의 작품이다. 그런데도 올림픽 창시자 쿠베르탱 남작은 알아도 손디는 이름조차 들어본 이가 별로 없다는 사실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아시아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하고 무지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20세기 아시아를 대표하는 인물 112명에 대한 짧은 평전을 모은 '위대한 아시아'는 서구에 의해 규정되고 평가된 아시아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시아인의 눈으로 새롭게, 다시 보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평전은 한 사람 당 200자 원고지 30매 안팎으로 각 인물의 파란만장한 삶을 녹여내기에 턱없이 부족하지만 정치 경제 학술 문학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어 '아시아 지성사'를 일별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윤상인(일본 문학) 한양대 교수, 이동철(중국 철학) 용인대 교수, 이희수(이슬람문화) 한양대 교수, 임상범(중국 현대사) 성신여대 교수 등 기획위원 4명이 시대 지역 분야별로 안배해 인물을 선정하고, 각분야의 전문가 80여명이 글을 썼다.
책에서 다뤄진 인물은 대부분 1945년 이후 활동한 이들이다. 1945년은 주지하듯이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된 해이자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이 서구의 식민지배에서 해방된 해다.
정치 분야에서는 미얀마의 민주화운동 지도자 아웅산 수지, 베트남의 호치민, 이란의 모함마드 하타미 대통령, 이집트의 아랍민족 지도자 가말 압델 나세르, 동티모르의 독립 영웅 사나나 구스마오, 사상·학술 분야에서는 베트남의 종교지도자 틱낫한, 일본의 비판적 지식인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이란 혁명을 이끈 호메이니 등이 꼽혔다.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와 세계적 건축가 안도 타다오(安藤忠雄), 중국의 솔제니친으로 불린 베이다오(北島), 터키의 현실참여 작가 야사르 케말, 몽골의 국민작가 차드라발링 로도이담바 등이 선정됐다. 아시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대중문화계 별들도 반열에 들었다. 국내에도 팬이 많은 중국의 무협작가 진융(金庸), 1980년대 '중국의 낮은 늙은 덩(덩샤오핑·鄧小平)이, 밤은 젊은 덩이 지배한다'는 말을 낳았던 여가수 덩리쥔(鄧麗君), 홍콩 영화배우 브루스 리 등이 그들이다.
국내에 잘 알려진 인물들이 많지만 낯선 얼굴도 적지 않다. 이집트의 전설적 여가수 움므 쿨숨(1898∼1975)을 보자. 힘차고 맑은 목소리로 아랍 민중의 가슴을 울린 그는 1937년 이집트 방송에서 해외공연 실황이 무려 634시간(26일10시간) 동안 연속 방송되는 등 숱한 진기록을 남겼고, 사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매년 30만장의 음반이 팔려나간다. 중국의 산문가이자 번역가인 지셴린(季羨林·92)은 '위대한 잡가'란 타이틀로 소개된다. 역사 언어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긴 그는 특히 "황하의 물이 30년은 서쪽으로 흐르고, 30년은 동쪽으로 흐른다"는 말처럼 21세기에는 동방 문화가 주류를 이룰 것으로 내다봐 주목받고 있다.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국제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 일본의 히로히토(裕仁) 천황, 캄보디아 '킬링 필드'의 주역 폴 포트 등 '위대한'이란 수식어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이들도 선정됐다. 편자는 아시아의 밝은 미래를 위해 그림자를 드리운 이들의 삶도 살피고 지나가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또 서구인으로는 유일하게, '20세기 동북아 냉전구조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한' 맥아더가 선정됐다.
인물 선정에서 서구의 잣대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국내 필진만으로 방대한 기획을 엮어낸 것은 척박한 아시아 연구풍토를 감안할 때 적지않은 성과이다. 이들은 또 국내 학계에서 두루 쓰이는 '중동(Middle East)'은 19세기 말 영국이 유럽을 기준으로 만들어낸 지리적 개념의 용어이기 때문에 서아시아란 말로 대체해야 한다거나 이집트는 지리적으로는 아프리카 대륙에 위치하지만 서아시아의 역사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아시아의 일원으로 대접해야 하며, 동아시아는 한·중·일 등 동북아 3국만이 아닌 동남아시아를 포함하는 용어로 쓰여야 한다고 지적하는데 국내 연구자들이 귀담아 들을만하다.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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