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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688)1·4후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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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688)1·4후퇴

입력
2003.0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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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1월4일 미8군 사령관 매슈 리지웨이가 휘하 군대를 서울에서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1·4후퇴가 시작되며 서울이 다시 인민군의 손안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전쟁 발발 초기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던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9월28일 서울을 수복한 데 이어, 38도선을 넘어 파죽지세로 북진해 10월26일에는 압록강까지 이르렀다.그러나 항미원조(抗美援朝)의 기치 아래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전세가 뒤바뀌었다.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11월28일 전면적 후퇴를 결정하며 "전혀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다"고 선언했다. 미국이 이끄는 유엔군과 한국군을 한 쪽으로 하고 북한군을 다른 쪽으로 해서 진행되던 전쟁이 미군과 중국군 사이의 전쟁으로 변했다는 뜻이었다. 중국군은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했던 때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남진을 계속해 그 해 12월3일 맥아더는 서부·동부 전선의 모든 유엔군 부대에게 38선으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니까 1·4후퇴는 서울을 기준으로 해서 생긴 말이고, 국군과 유엔군의 후퇴는 그 전 해 11월28일을 기점으로 시작된 것이다. 한국전쟁 때의 이산 가족은 전쟁 초기 인민군의 남진 때보다 11월28일 이후의 유엔군 퇴각 때 주로 생긴 것이다. 12월 하순의 흥남 철수는 김동리의 소설 '흥남 철수'에서 다소 멜로드라마틱하게 재현된 바 있다. 보통 한국인들이 지닌 흥남 철수의 이미지는 강사랑의 노래말에 박시춘이 곡을 붙인 '굳세어라 금순아'와 주로 관련돼 있을 것이다. 그 1절은 이렇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 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를 가고 길을 잃고 헤매이더나/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고 종 석/편집위원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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