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컹덜컹… 아빠의 고물 트럭이 언덕길을 힘겹게 오릅니다.우리 식구가 목욕탕엘 다녀오는 길입니다. 우리 동네는 작은 산골 마을이라서 목욕탕이 없습니다.
"아함…"
목욕을 끝내고 자장면까지 먹었더니 온몸이 나른하고 잠이 옵니다. 다연이는 벌써 쌔근쌔근 잠이 들었습니다.
"끼익!"
"어이쿠!"
"어머니 놀라시게 무슨 일이에요?"
엄마는 나나 다연이보다 할머니 걱정을 먼저 합니다.
"휴… 괜찮다. 애들이나 살펴라."
그제야 우리를 바라봅니다. 언제나 그러니까 서운하지도 않습니다.
심장이 안 좋은 할머니는 두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습니다.
"산토끼에요, 어머니."
어느새 차에서 내린 아빠가 눈이 똥그란 갈색 토끼 한 마리를 들고 차에 오릅니다.
"와, 토끼다!"
잠이 십 리 밖으로 달아난 다연이와 나는 목소리가 또랑또랑합니다.
"웬 퇴깽이를 길에서 줏어와? 눈이 많이 쌓여 먹을게 없었던 모양이구먼."
"갑자기 불빛을 보면 놀래서 딱 멈춰 서거든요. 그런데 이놈은 발을 다친 모양이네요."
"저런, 쯧쯧, 겨울엔 더 시리고 아픈 벱인디, 잘 낫지두 않구…"
"어두우니까 집으로 데리고 가 봐야겠어요."
멍멍멍멍, 끼잉끼잉…
진순이가 바지자락을 물고 늘어집니다. 혼자 집 지키며 기다렸는데 온 식구가 아는 체도 않고 집안으로 들어서니 서운한 모양입니다.
환한 방 안이 눈이 부신 걸까요. 아니면 낯설어서일까요. 내려놓기가 무섭게 책상 밑으로 내닫는 토끼를 아빠가 재빨리 붙잡았습니다.
"다연아, 우리 이름 지어주자. 뭐가 좋을까?"
"음… 아빠! 암놈이에요? 숫놈이에요?"
상처를 살피던 아빠가 산토끼의 두 귀를 움켜쥐고 들어올리자 대롱대롱 매달립니다.
"이놈 암놈이구나."
"토순이! 우리집 진돗개는 진순이니까 토순이라고 지을테야. 그래야 한 식구 같잖아."
"우리 다연이 말이 백 번 옳다. 한 식구는 어떻게든 표시가 나는 벱이지, 허허허."
할머니는 뭐가 그리 좋은지 자꾸 웃습니다.
토순이는 오른쪽 뒷다리를 다쳤습니다. 아빠는 올무나 그물에 걸린 다리를 빼다가 상처가 난 것 같다고 했습니다. 산에 올무와 덫을 놓아서 짐승을 잡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는 텔레비전에서 보고, 책에서도 읽어 알고 있습니다.
우리 동네를 둘러싼 산에는 노루나 고라니, 너구리, 멧돼지, 산토끼, 다람쥐 등 산짐승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수렵기간이 되면 사냥꾼들이 외지에서 짚차를 타고 옵니다. 탕, 탕! 느닷없는 총소리에 놀라 동네 사람들은 산 근처에는 얼씬도 못합니다.
다연이는 산토끼가 돌부리에 채어서 다쳤을 거라고 했습니다.
나는 일기에 토순이가 우리 집에 온 이야기를 썼습니다.
다연이의 그림일기 제목은 '우리 식구'입니다. 할머니, 아빠, 엄마, 나, 다연이, 진순이와 다리 하나가 빨간 토끼 한 마리를 그렸습니다.
이튿날, 다연이와 나는 다른 날보다 훨씬 더 일찍 일어났습니다.
겁먹은 듯 몸을 잔뜩 웅크리고 움직이지도 않는 토순이는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면서 책상 밑이나 싱크대 밑, 가구 틈새 등 구석으로만 숨으려 듭니다.
다연이는 토순이를 만져보고 싶고, 눈도 맞춰보고 싶어 안달입니다.
"낯설고 아파서 그럴 거야, 네가 자꾸 그러면 토순이를 괴롭히는 게 돼. 이따 아빠가 병원에 데리고 갔다 올 테니 너희들은 어서 학교에 가거라."
"배가 고플 텐데, 밥 좀 주지."
"산토끼는 밥을 안 먹어."
"목이 마를 텐데, 물이라도 주지."
"토끼는 물을 먹지 않아."
"그럼 굶어 죽잖아!"
속이 탄 다연이는 화가 나서 입이 툭 튀어나옵니다.
"아빠가 먹이를 찾아보마, 됐지?"
"엊저녁부터 굶었는데, 지금 주지…"
다연이는 한번 얘기를 시작하면 여간해서 끝을 맺지 않습니다.
"첫날인데 늦것다, 아빠가 알아서 할 테니 너희들은 어여 핵교 가."
할머니는 싫다고 뻗대는 다연이에게 모자와 귀마개, 장갑에다 목도리까지 둘러 꽁꽁 여며 주고서야 품 안에서 풀어줍니다.
우리 학교는 전교생이 36명인 작은 분교입니다. 학생이 적어 1학년인 다연이와 3학년인 내가 한 교실에서 공부를 합니다. 모두 합해봐야 1학년 5명, 3학년 6명, 모두 11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친구들한테 토순이 자랑을 했더니 보고 싶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토순이를 힘들게 하면 안됩니다. 다 나으면 보여주겠다는 약속을 몇 번이나 하고서야 친구들은 다연이와 나를 놓아주었습니다.
집에 들어서자 진순이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와 다연이와 내 다리에 몸을 부빕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좋다고 낑낑거립니다.
귀가 어두운 할머니도 금방 우리가 온 걸 알고 방문을 엽니다.
"할머니! 토순이는요?"
"주사두 맞구 약두 발렀으니께 메칠만 지나면 나을 거여. 걱정 말어. 핵교에서 즘심은 뜨뜻하게 잘 먹었남?"
"토순이 어디 있어요?"
"저기 마루에 고추 포장하는 빡스 뵈지? 자는지 조용하구먼."
"마루는 추워요."
"부러 불길 안 닿는 디다 논거여. 퇴끼는 눈속에서 살잖남?"
다연이와 나는 살금살금 다가가 뚜껑을 열었습니다.
인기척에 귀가 움찔하더니 몸을 더 웅크립니다. 붕대 감긴 다리와 쫑끗, 큰 귀만 없다면 부드러운 갈색 털뭉치 같습니다. 한쪽에 배추 잎사귀도 놓여 있습니다. 엄마가 뒷곁 무구덩이에서 꺼내왔을 겁니다.
나는 토순이를 만지고 싶어 안달이 난 다연이를 말리느라 진땀이 났습니다.
"생전 처음 새로운 일을 겪었으니 놀래서 진이 다 빠졌을 게다. 주사두 맞었으니께 좀 쉬게 두고 이리 와, 고구마가 밤 마냥 폭삭폭삭한 게 아주 달다."
할머니가 양손에 고구마를 들고 앉은걸음으로 다가옵니다.
윗마을 줄골에 있는 꼬추삼촌네 비닐하우스에 가면 토순이에게 줄 야채들이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고랑에 토끼풀은 아니더라도 어린 풀도 있을지 모릅니다.
'다연이랑 갔다 와야지…'
오물오물 고구마를 먹고 있는 다연이 입을 보며 괜히 내 마음이 즐거워집니다.
토순이가 우리 집에 온지 그새 닷새나 되었습니다.
그 동안 아빠는 가축병원에 한번 더 다녀왔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바르고 붕대로 매주었습니다. 보기에도 딱지가 앉은 것이 많이 나은 듯 합니다.
나와 다연이는 꼬추삼촌네 비닐하우스에 세 번 다녀왔습니다. 배춧잎보다 다연이랑 내가 가져다주는 상추, 오이, 당근, 어린 풀들을 더 잘 먹습니다. 큼직한 앞이빨 두 개로 오물오물 먹을 때는 사각사각 소리가 납니다.
이제는 다연이와 내가 쓰다듬고 만져도 가만 있습니다. 하지만 안아주는 것은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동생이 심하게 굴면 도망을 치는데 콩기름 먹인 방바닥이 미끄러워 자꾸 뒤뚱거립니다. 얼마나 귀여운지 온 식구가 까르르 하며 웃지 않고는 못배깁니다.
다연이는 까만 토끼 똥을 검정콩인줄 알고 엄마에게 주워다 준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밖에 있는 진순이처럼 껴안고 뒹굴며 장난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아범아, 이제 웬만하면 돌려 보내거라. 맴의 병이 더 무서우니라."
"그러잖아도 내일쯤 보낼 참이어요. 어머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안돼요. 다리가 아직 안나았잖아요, 봐요, 붕대도 안 풀었는데…"
다연이가 토순이에게 달려가 두 팔로 막고 볼멘 소리를 합니다.
"아빠, 같이 살면 안돼요?"
"할머니, 보내지 말아요. 산은 춥고 먹을 것도 없잖아요? 또 다치면 어떡해요?"
다연이는 언제나 우리 편인 할머니에게 매달립니다.
"얘들아, 이리 오렴!"
다연이랑 나는 아빠의 무릎을 하나씩 차지하고 앉습니다.
"물고기가 사는 곳은 어디지?"
"은고개 저수지요."
학교 가는 길에 있는 은고개 저수지는 겨울에 얼음 구멍을 뚫고 빙어낚시를 하던 곳입니다. 다연이 대답에 할머니, 아빠, 엄마가 웃습니다.
"그럼 새는 어디에서 살지? 배추벌레, 딱정벌레, 매미는 어디서 살고, 멧돼지, 노루, 다람쥐가 사는 곳은 어디지?"
아빠가 물었습니다.
"하늘, 산, 나무, 땅 모두 달라요."
"그렇지! 새들은 하늘을 날고, 배추벌레는 배추가 집이지? 또 매미는 나무에서 울고, 멧돼지나 노루는 산과 들을 맘껏 뛰어다녀야 행복하지 않겠니?"
"그럼 토순이에게 가장 좋은 곳은 산 속인가요?"
"그래. 이제 다 나았으니 돌아가야지."
"하지만 토순이는 우리 식구인걸요. 식구는 함께 살잖아요."
다연이가 풀죽은 목소리로 말합니다.
"허허허, 다연아, 지난 여름에 왔던 서울할머니 있쟈? 그 할머니는 이 할미 동생이여, 너와 네 언니마냥 한 형제여, 거기 말구두 여기 저기 아주 많단다. 바다 건너 미국에두 있는걸!"
"미국에도요?"
"그럼, 미국보다 더 먼데 떨어져 살아도 식구는 언제나 한 식구여. 알았쟈?"
"네."
"어이구, 우리 강아지덜, 퇴깽이 덕에 이렇게 컸나?"
그날 밤, 나는 겨우 반쪽밖에 못 채우던 일기를 두 장이나 썼습니다.
토요일이 되었습니다.
"주명아, 학교 끝나면 다연이 데리고 바로 오너라."
"친구들하고 같이 와도 돼요? 토순이 보여주기로 약속했거든요."
"그럼, 되구 말구"
"아빠! 나두."
"다연이도? 어이구, 아빠 트럭이 꽉 차겠는걸! 하하하…"
"이러다 애들 학교 늦겠어요. 나머지 얘기는 학교 갔다 오면 하세요."
엄마가 시계를 보며 재촉을 합니다.
"그냥 둬라, 부모 자식간에 이 얘기 저 얘기 주고받는 것도 큰 공부니라. 늦으면 아범이 태워다 주면 되지. 그렇쟈?"
할머니가 나를 보고 눈을 찡긋 합니다.
"아니에요, 걸어 갈래요, 다연아, 학교 가자!"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나와 다연이는 어깨에 가방을 메고 꼭 잡은 손을 흔들며 힘차게 걷습니다.
동네에서 제일 큰 느티나무를 지나고, 이장 아저씨네 집도 지나고, 우리 고추밭도 지났습니다. 저수지 길이 끝나고 은고개를 넘으면 학교가 보입니다.
언제나처럼 고추밭까지 따라온 진순이가 밭머리에 서서 꼬리만 흔듭니다.
"언니, 이건 비밀인데 토순이를 보내야 하는 진짜 이유가 있어."
"그게 뭔데?"
그때 까투리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오릅니다.
다연이는 까치발을 들고 내 귀에 속닥속닥 귓속말을 합니다.
"그건 토순이가 엄마토끼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야. 아기와 엄마는 떨어져 살면 안되거든."
다연이는 커서 철학자가 될지도 모릅니다. 아니 화가가 되어도 좋을 겁니다.
오늘 밤 다연이의 그림일기가 궁금해집니다. 어쩌면 토순이 새끼뿐 아니라 산 속 동물들까지 가득 그려놓고 '우리 식구'라고 제목을 붙일지도 모릅니다.
머잖아 봄이 오면 온 산 여기저기에 뛰노는 산토끼랑 노루랑 다람쥐, 하늘 높이 나는 온갖 새들이 눈에 보일 듯 선합니다.
그래도 아직은 산이 하얘서 다행입니다.
좀 춥지만 해가 나지 않은 것도 다행입니다.
토순이가 돌아갈 곳이 낯설면 안되거든요!
<끝>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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