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위에서는 본 적도 없는 아이들이 쿵쿵거리고, 창 너머 새벽녘까지 꺼지지 않는 불이 수험생들의 경쟁심을 부추기며, 신문 올 때쯤 되면 불과 5m아래의 강아지가 왕왕 짖어대는 곳. 얇은 벽을 경계로 알게 모르게 타인의 삶과 뒤섞이거나 자신만의 공간이 방해받는 곳이 바로 아파트다. 1970년 우리나라에 아파트가 처음 들어선 이후 현재 수도권 인구의 약 50%가 아파트에 거주할 정도가 됐지만 아직도 아파트하면 '벽''단절''폐쇄' 등 부정적 느낌이 먼저 든다. '늦은 밤 누가 따라와서 괴한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옆집 사람이었다'는 우스갯소리도 낯설지 않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 같은 아파트 문화를 바꿔보자는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고 있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아파트 공동체' 바람이 그것이다."이 녀석이 우리 아들 승배입니다. 주변에서 보이면 '네가 똘배냐'고 물어주세요. 녀석은 하늘색 퀵보드나 노란 철제 자전거를 주로 타고, 야밤에 산책을 즐기며 놀이터에서 모래를 갖고 노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경기도 용인시 금화마을 주공 그린빌 아파트에 사는 이진상씨는 인터넷 아파트 동호회에 아들을 소개하는 글을 사진과 함께 올렸다. 이후 아들 승배는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인사를 건넨다며 신이 나 있다.
아이뿐 아니라 이씨 자신에게도 걸어서 불과 5분 거리에 사는 지역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쏠쏠한 재미다. 저녁시간 허전할 때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만나 간단한 맥주 한잔으로 심심함을 달랠 수 있을 뿐 아니라 좋은 놀이방, 초고속 인터넷 선택법 등 삶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정보까지 덤으로 얻는다. 이 아파트 동호회는 한 달에 한 번 정기 모임을 갖고 노인정 설치, 시설하자 보수 등 아파트를 발전시키는 방안에 대해서도 의견을 모은다.
그동안 지역사회에 대해 무관심했던 주민들을 다시 공동의 장으로 불러들인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인터넷이다. 그린빌 아파트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김필씨는 "20개동의 동대표가 만나는 정기 모임 외에도 관심사와 연령대에 따른 모임이 수시로 열린다"며 "인터넷 동호회가 활성화되면서 엘리베이터나 산책로에서 웃으며 인사를 나누는 주민들이 눈에 자주 띈다"고 말했다.
최근 김씨는 이 아파트 홈페이지에 광고성 글을 올린 한 곶감 농장 주인에게 이메일을 보냈다가 주민들을 위해 곶감 샘플을 선물하겠다는 답장을 받았다. 시식 후 반응이 좋으면 설날을 겨냥한 공동구매까지 추진할 예정이다.
아파트 동호회는 입주하기 전에도 톡톡한 역할을 한다. 분양받은 아파트가 얼마큼 지어졌는지, 약속한 옵션은 제대로 들어가는지 궁금하기 마련. 매일 가 볼 수는 없지만 인터넷 동호회에 올라온 게시물들을 통해 정보를 얻고 시공사의 잘못이 있을 때는 공동으로 대처하기도 한다.
지난해 11월 입주한 강서구 화곡동 대우아파트는 9월 초부터 인터넷 동호회를 열고 이사, 청소, 새시 등을 공동구매했다. 입주 전 사이버상에서나마 알고 지내던 주민들은 같은 아파트로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지역 공동체를 형성했다. '쓰레기 줄이기', '아파트 주변환경개선' 등 생활과 관련해 온·오프라인으로 활발한 토론을 벌여온 주민들은 앞으로 학교 선생님을 동호회로 초대해 대화의 장도 마련할 예정이다.
이 아파트에 살면서 동호회를 구축한 서광섭씨는 "사람사귈 때 첫말 건네기가 제일 힘든 법"이라며 "인터넷 동호회를 통해 입주하기 전부터 온라인으로 인사를 나눈 사람들은 직접 만나도 마치 오랫동안 알아온 것처럼 거부감 없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고 말했다. 웹에이전시를 운영하는 서씨는 동호회를 통해 아파트 문화가 바뀌는 것을 보고 회사에 아예 아파트 홈페이지 사업부를 설치, '정으로 뭉친 내 아파트'라는 캠페인까지 진행하고 있다.
시루떡 돌리던 풍습 대신 주부 중심의 간단한 홈파티로 안면을 트는 것도 아파트 속 새로운 공동체 문화의 한 모습이다. 참공간 디자인 연구소 이명희 소장은 작년 12월부터 '우리 새 집으로 이사했어요'라는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12월27일 서울 강남구 잠원동 롯데 캐슬 아파트로 새로 이사한 김윤경씨 집에서 간단한 인테리어 강연회와 함께 진행된 첫 홈파티에는 10여명의 주부들이 찾아와 담소를 나누고 얼굴을 익혔다. 이 소장은 "초대장을 받고 홈파티에 참가한 주부들 중 이전에 만난 적이 있는 주부는 한 명도 없었지만 공통의 관심사가 많은 만큼 이내 친해졌다"고 말했다.
이번 달 강남구 청담동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리는 두 번째 홈파티에서는 '주부명함 만들기' 이벤트도 열 예정이다. 상가나 엘리베이터에서 갑자기 이웃을 만났을 때 명함을 주고 받으면 계속 연락할 수 있는 '이웃 친구'로 쉽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김신영기자 ddalgi@hk.co.kr
■아파트 공동체 만드는 법
아파트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 가장 간단한 방법은 다음이나 프리챌 같이 커뮤니티를 지원하는 사이트에 자신의 아파트 동호회가 있나 검색해보고 없으면 직접 이를 만들어 운영하는 것이다. 기본적인 자료실과 게시판 기능만 있으면 의견 공유의 장으로 손색이 없다. 다른 아파트 동호회를 둘러보며 미리 아이디어를 얻어보는 것도 좋다.
아파트를 분양 받고 입주를 기다리고 있다면 부동산 전문 사이트인 '닥터아파트(www.drapt.com)'의 '입주전 동호회'를 둘러보자. 전체 분양 아파트의 70% 정도인 750개 아파트의 '입주전 동호회'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아파트가 세워지면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실제로 시공사에서 약속한 옵션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 동호회를 기반으로 서명을 받아 주민들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경우도 종종 있다.
어느 정도 회원이 모이면 개별 홈페이지를 개설해보자. 일반 커뮤니티에 비해 용도에 따른 게시판이나 설문조사 메뉴를 자유롭게 추가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홈페이지를 제작해본 경험이 있다면 주민 중에 한 명이 간단히 만들어도 되고 여건이 안되면 웹에이전시에 맡겨도 된다. 그냥 제작할 때 비용은 300만원 정도이지만 홈페이지를 통해 들어온 광고 수익금을 배분하기로 하면 무료로 제작해주는 곳도 많다.
아파트 공동체를 원만히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오프라인 운영회와 긴밀한 연계를 유지해야 한다. 닥터 아파트의 곽창석 이사는 "초기에는 정보공유 기능만 하던 커뮤니티가 시간이 지나면서 예전 '마을'의 모습을 되찾기 위한 장이 되고 있다"며 "다양한 세대의 의견을 반영해 기존 운영회의 결정에 적용하는 등 온·오프라인의 조화로운 활동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신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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