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월 대통령에 취임할 노무현(盧武鉉) 당선자에 대해 기대와 우려의 목소리가 교차하고 있다. '인터넷혁명', '세대혁명'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은 파격적 정치과정을 통해 당선자가 된 그에게 국민은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2002년 마지막 날. 변화의 주체 세력으로 떠오른 386세대의 일원인 강원택(康元澤·42·숭실대 정치외교학)교수와 장덕진(張德鎭·37·서울대 사회학)교수 등 소장 학자들과 함께 좌담을 나눴다.● 강원택 (康元澤·42)
숭실대 정치외교학과교수
서울대 지리학과졸
영국 런던정경대박사(정치학)
● 장덕진 (張德鎭·37)
서울대 사회학과교수
연세대 사회학과졸
시카고대박사(사회학)
■선거결과
강원택= 이번 대선의 키워드는 '변화'였다. 선거를 통해 3金의 정치적인 퇴장, 지역주의 약화 징후 등으로 새로운 형태의 경쟁의 축이 형성됐다. 또 후보별 이념·정책적 차이가 세대에 따라 달리 수용된 측면이 있다. 20∼30대들은 구정치에 대한 변화, 냉전적인 사고 청산에 대한 욕구를 분출했다.
장덕진= 중요한 것은 '세대'였다. 40대를 기점으로 차별성이 부각됐다. 짧게는 80년대, 길게는 유신시대부터 축적되어 온 에너지가 폭발한 결과다. 80년대 대학을 다닌 세대가 사회 중추로 올라섰다는 의미다. 이들은 비판적이면서 변화를 쉽게 수용하는 세대다. 물론 인터넷이라는 뉴미디어가 촉매역할을 했다.
강원택=인터넷이 커뮤니티형성이나 토론의 기능뿐만 아니라 정치적 동원의 기능을 지녔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줬다. 촛불시위도 인터넷을 통해 이뤄진 것은 놀랍다. 과거에는 3김 정도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가 아니라면 광화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을 동원할 수 없었다.
장덕진= 세계 최강의 인터넷 인프라를 보유한 한국이 세계 역사상 최초의 선거모델을 실험했다. 정치·사회적 명분이 있는 내용을 인터넷을 통해 급속히 전파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한 셈이다.
■세대문제
장덕진= 권력 이양 과정에서 전통을 거부하는 혁명이 일어났다. 기업의 회장, 기관의 수장 등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나 권위를 가진 세대가 사라지거나 자발적으로 권력을 물려줬을 때만 권력 승계가 이뤄졌다. 하지만 이번 대선은 권위(권력)를 물려줄 의도가 없던 윗세대에게서 아랫세대가 빼앗아 간 것이나 다름없다.
강원택= 어떤 이유로 세대차이가 생겨났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보수냐 진보냐, 혹은 유럽처럼 경제적 재화의 소유구조에 따라 세대차이가 드러난 것도 아니다. 역시 냉전적 사고와 안보 이데올로기가 세대를 갈라놓은 측면이 강한 것 같다. 특이한 것은 30대가 20대보다 훨씬 진보적이라는 것이다.
장덕진= '기존 틀'을 깬 젊은 세대도 '대안 틀'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지역감정이나 대북관계에서 50대 이상이 갖고 있는 냉전, 수구적인 틀을 부정하는 젊은 세대는 아직 대안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이 없다. 지나간 시대의 모델을 부정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세대혁명이 성공할 수 없다.
■지역감정·반미
강원택= 3김만큼 지역적 지지를 끌어낼 정도의 카리스마를 지닌 후보가 없었다. 호남 지역에서 몰표가 나왔지만 이는 김대중 대통령의 영향력이 작용한 마지막 선거라고 볼 수 있다. 이회창 후보가 김대중 대통령의 '대항마'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다. 호남으로서는 김대중 대항마인 이회창 후보를 수용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3김의 물리적인 퇴장과 더불어 앞으로는 지역감정이 과거와 같은 양상으로 전개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3김은 '지역기반+가신'의 구도였으나 '인재 풀'이 제한되어 있었다. 반면 노당선자는 지역, 가신 등으로부터 자유로운 편이다.
장덕진= 3김은 지역감정과 관련, 적어도 수동적 방관자 혹은 가담자였다. 지역 감정은 지난 번 대선과 유사했으나 완화가능성은 있다. 노무현 당선자가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개선될 여지는 많다. 지금까지의 문제는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측근과 가신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인재 풀'이 지역적으로 제한됐기 때문이다.
강원택= 반미시위라는 용어도 수정할 필요가 있다. 최근의 촛불시위 양상은 한 언론의 지적처럼 '안티 아메리칸'(Anti-American)이 아니라 '프로 코리언'(Pro-Korean)으로 보인다. 과거처럼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 양국간 정당한 관계를 요구하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라난 젊은 세대들은 88올림픽과 월드컵을 지켜보면서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불평등을 '고치겠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반면 50대는 젊은 세대의 이런 행동이 미군철수 주장으로 이어지는 것 아니냐며 불안해 한다. 이러한 '간극'을 어떻게 좁히느냐가 과제다.
■경제분야
장덕진=경제 개혁도 좋지만 자본주의 근간이 되는 예측가능성을 제도적으로 확보해 주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개혁을 외쳤지만 5년 후 이 개혁이 다시 부정당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경제 행위자들에게는 예측가능성이 더욱 중요하다. 개혁이 전 정권에서 실시됐다는 이유로 사라지고, 축소되고, 바뀌는 것은 사회·경제적 낭비를 초래한다. 지금의 경제정책은 자본주의 사회의 통상적인 게임의 법칙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정권이 바뀌면 폐기되는 '룰'이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특정인이 아닌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일반적인 '룰'이 형성되어야 한다.
강원택= 이전 대통령처럼 임기 내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려는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 대통령 단임제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선거운동 기간 제시된 경제공약 중 국가경제에 부담을 줄 수 있는 것은 후순위로 미루고, 불필요한 공약은 과감히 버릴 수도 있어야 한다. 국민도 이해할 것이다. 무리하게 추진하면 더 큰 화를 입는다. 지방공항건설, 고속전철 등이 국민에게 부담만 안긴 측면이 있다. 노조 역시 경제활동의 큰 축으로서 책임감을 갖는 성숙한 자세가 필요하다.
장덕진= 경제개혁과 동시에 산업경쟁력 확보도 중요하다. 우리 사회는 1980년대 이후 '발전국가'(Development State) 모델이 해체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이후 20년간 새로운 발전 모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해왔다. 새 정부는 어떤 모델을 가져야 하는지 구체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을 제시해야 한다. IMF 이후 우리 사회를 지배한 '글로벌 스탠더드'도 모델이 될 수 없는 막연한 개념이다. 국가가 어떤 경제적인 모델을 만들어 '룰'을 정착시키고 제도화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 도출이 절실하다.
■정치개혁
강원택= 가장 기대되는 것이 정치개혁이다. 국민참여경선이라는 정치적인 실험, 노사모라는 자발적인 참여지지층에 의해 당선이 된 노무현 당선자는 정치개혁에 가장 큰 성과를 이룰 가능성이 높다. 각 정당이 이미 민주적, 개방적인 구조로 개혁을 시도하고 있다.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정치인에게 지불하는 상황이 연출됐다. 덕분에 대통령 당선자가 정치자금이라는 '원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됐다.
장덕진= 노 당선자는 김해 출신으로 호남사람도 아니고 민주당내 다수파도 아니다. 따라서 기존의 정치관행에 얽매일 이유가 없다. 따라서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는 동시에 크게 실패할 수도 있다. 장기적인 초석을 어떻게 놓느냐가 정치개혁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다.
강원택 = 김영삼·김대중 정권은 측근 및 가신정치의 한계를 벗지 못해 '실패한 정권'이라는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대통령과의 친소 관계가 권위의 원천이 되는 상황에서는 부패문제가 항상 발생할 소지가 있다. 개인이 아닌 시스템을 중심으로 통치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내각에게 실질적 권한을 주고, 청와대 비서실 기능을 대통령을 보좌하는 쪽으로 축소하는 것도 방향이 될 수 있다.
장덕진= 정치인의 업적과 무관하게 지역을 기반으로 당선이 보장되는 구조가 타파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정치 신인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야만 구정치인들의 정치과점구조를 깨뜨릴 수 있다.
■386세대의 과제
강원택= 당선자와 함께 새 주역이 된 것은 이른바 386세대라고 본다. 따라서 앞으로 386세대 역할 또한 중요하다. 386세대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한국 사회를 압박해왔던 냉전 이데올로기, 권위주의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과거의 부담에서 벗어나 사회적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장덕진= 새 정권 출범은 과거의 여러 시스템이 해체되고 교차하는 지점에 있다. 정치적으로 3김의 물리적 퇴장, 경제적으로 구 발전 모델의 해체, 세대적으로 권위 이양이 이뤄진 단계에 서 있다. 문제는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모델을 만들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386세대는 변화의 물꼬를 트는 사명을 지녔지만 경험은 부족하다. 따라서 경험이 풍부한 50대와 앞으로 성장할 20대를 이어주는 세대간 통합역할을 386세대가 담당해야 한다.
/정리=조재우·정원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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