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심 과정 없이 우리는 응모작 1만여 편을 직접 다 읽어야 했다. 이렇게 많은 응모작 앞에서 우리는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신춘문예'라는 아름다운 계절병이 도지고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 읽혀지기를 원하는 시의 의지가 폭넓게 퍼져 있다는 것에 경이감과 함께 의아스러움을 느낀다.그만큼 우리 사회의 시적 리터러시가 높다 하겠다. 이는 시가 과거의 유물이거나 소수 마니아를 위한 장르로 치부되고 있는 세계 여러 나라의 경우와 달리, 우리가 이례적으로 누리고 있는 시의 축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분에 넘치는 시의 복지가 한낱 거품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응모작들을 읽어가는 동안 떨쳐버릴 수 없었다는 것도 우리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응모작의 태반이 이것도 시라고 생각하고 쓴 것일까 하는 당혹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워드 프로세서의 보급으로 곧바로 눈 앞에 뜨는 활자체가 시 아닌 것도 시처럼 보이게 하는 착각을 주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전반적으로 시를 너무 쉽게, 혹은 함부로 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엇다. 아니면 지금의 우리 삶이 그렇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어떤 것이 시이기 위해서 가져야 할 제한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시를 이렇게 쓸 수밖에 없는 어떤 내적 필연성을 갖고 있는가?
이 두 물음을 견딘, 김일영씨의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와 고경희씨의 '겨울단상', 그리고 차주일씨의 '삼베옷에 밴 땀내'를 최종심에 놓고 우리는 고심하였다. 차주일씨의 '삼베옷…'은 삶에서 우러나오는 체험의 심도가 있어보인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꾸며서 쓴 것 같지 않다는 것도 장점으로 지적되었다. 그러나 시가 어떤 시상을 향해 응축되기보다는 풀어져 있으며 그것의 구성에 있어서 다분히 평면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고경희씨의 '겨울단상'은 그의 다른 시편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체적으로 시를 유지시키는 고른 수준을 획득하고 있다는 점에서 평가받을 만하다. 자신의 어떤 정신적 외상과 관련된 듯한, 어딘지 '병적인' 상흔들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그것을 시의 무늬로 그려나갈 줄 안다는 점도 돋보였다.
그러나 그의 시가 단아하고 안정감을 준다는 것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였다. 그것은 금방 소품주의(이것은 시가 짧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의 한계 안에 안주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완성도는 다소 떨어져 보이지만 지금 씌어진 것 그 이상의 시, 호흡이 긴 시를 쓸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 때문에 우리는 김일영씨를 당선자로 결정하는 데 동의하였다.
'슬쩍 따라온 별이/ 가장 넓은 밤하늘을 배불리 빛내던'과 같은 구절에서 보듯 그는 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 되게 하는 특별한 안목을 터득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 시의 후반부나 그의 다른 시편에서 드러나듯 언어의 과부하가 걸려 시적 인식이 비전도체처럼 막혀버리는 과욕을 앞으로 그가 조절해야 할 것이다. 정진을 바란다.
/심사위원=김광규 정희성 황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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