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재의 창의성은 세상을 바꾸는 힘이며, 영재는 곧 국가의 자산이다." 국내외 교육전문가들이 영재교육의 중요성을 얘기할 때 즐겨쓰는 말이다. 하지만 구구단과 천자문을 줄줄 외던 우리 영재들은 잘못된 입시제도에 날로 멍들고 있다. 얼마전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우리나라 학생의 학업성취도가 평균치보다 크게 떨어진다는 자료도 나왔다. 우리의 '평등교육' 신화가 영재를 내몰았다는 얘기다. 정부도 마침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 올해 부산과학영재고를 개교하는 등 범국가적 영재육성에 나서기로 했다. 일찍부터 영재교육을 체계화하고 갖가지 지원을 아끼지 않는 미국, 영국, 러시아, 이스라엘 등의 영재교육 시스템을 현장취재, 영재육성의 방법을 모색해 본다.
미국 워싱턴DC 옆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시 토마스 제퍼슨 과학기술고등학교(TJHSST)의 화학 실험실. 앞치마를 두르고 보안경을 쓴 학생들이 분주하게 손을 움직인다. 좀 떨어진 생명공학 실험실에선 교사가 비이커에 뭔가를 끓이고 있다. 그는 "박테리아를 배양하는 중"이라며 냉장고에서 샬레를 꺼내 보여준다. 막 실험을 끝낸 학생들은 보고서를 정리하거나 컴퓨터로 자료를 검색중이다.
이 학교에는 천문학, 로보틱스, 컴퓨터시스템 등 모두 13개의 연구실험실이 있다. 그런데 어디서도 교사가 칠판 위에 복잡한 공식을 쓰거나 열변을 토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안 가르치냐구요? 학생들은 스스로 가르칩니다." 생명공학 실험실의 교사 래리 고드리얼트씨는 12학년(우리나라 고3) 학생들의 연구 프로젝트 목록을 보여준다. 학생들이 이번 학기의 연구주제로 선택한 것들이다. 그는 "연구는 학생들이 하지, 교사가 가르치지 않아요. 저는 학생들이 질문할 때 조언을 하죠. 교사는 기초적인 실험방법 정도만 가르칩니다"라고 말했다.
이 곳에서 태어난 12학년 신지혜양은 비디오테크놀로지&커뮤니케이션 실험실에서 자신의 연구 프로젝트인 단편영화를 자랑했다. 그는 "친구들과 직접 찍은 건데 지금 편집중"이라며 "영화를 만드는 게 정말 재미있다"고 말했다.
졸업반의 필수과목인 연구수업은 보고서를 작성, 친구와 교사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학교 벽 곳곳에는 지난해 발표된 포스터들이 붙어있다. 수준이 예사롭지 않다. 현관 옆에 전시된 포스터의 주제는 '감마선 폭발'. 요즘 천문학자들이 머리를 싸매고 연구하는 문제다. 눈길을 끄는 것은 미 해군연구소의 박사와 공동으로 연구했다는 점. 바로 학교가 자랑하는 멘토십(mentorship) 프로그램의 결실이었다.
멘토십이란 학생이 외부 전문가를 한 학기동안 멘토(개인교사)로 삼아 주 12∼15시간 방문하며 공동연구를 하는 것이다. 12학년생의 20%는 멘토십으로 연구수업을 대체한다. 멘토십 코디네이터는 학생의 연구 주제에 따라 멘토를 물색해 주고, 학기 중 4번 멘토를 방문해 관리 감독한다. 최종 연구보고서는 저널에 발표되기도 한다.
멘토십에 대한 지역사회의 관심과 기여는 놀라울 정도다. 해군연구소, 국립보건원 같은 국립 연구기관뿐 아니라 정보통신업체인 UUNet, 위성 제작사인 TRW, 언론사인 USA투데이 등 64곳이 멘토기관으로 참여한다. 멘토십 코디네이터인 존 K 솔로몬씨는 "보수나 혜택이 전혀 없지만 필요한 멘토를 구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고 말했다. 학생 입장에선 '진짜 연구'에 흥분하게 되고, 멘토들도 신선한 시각과 열정을 가진 학생연구원에 도움을 얻는다.
이 학교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생물·영어·기술 통합수업(IBET). IBET수업의 교사 칩 랜달씨는 여름철 새장의 온도상승 실험에 대해 설명하며 "새장의 온도 상승이 새에 미치는 영향(생물학), 컴퓨터를 이용한 칩 분석(컴퓨터공학), 그리고 이에 대한 보고서 작성(영어)을 통합적으로 교육하는 수업"이라고 말했다.
이런 교육을 받고 졸업한 학생들은 99%(한 학년 약 420명)가 4년제 대학에 진학한다. 2001년 졸업생들은 하버드대 13명, 코넬대 34명, 펜실베이니아대 20명 등 20% 정도가 아이비리그에 입학했다. 저렴한 학비 등 이점이 많아 학생들이 가장 많이(223명) 진학하는 대학은 버지니아주립대. 미국 주립대 중 상위 1,2위를 다투는 명문 대학이다.
2002년엔 151명이 전국 장학금 수상 후보(National Merit Scholarship Semifinalist)로 선정됐다. 보통 상위 1%의 우수생이 후보로 선발되는데 미 고등학교를 통틀어 가장 많은 수를 배출했다. 이들이 올 3월 최종 장학생으로 선발되면 연간 2,500달러의 장학금을 받게 된다.
토마스 제퍼슨 과학기술고 학생들의 하루는 다른 고등학생에 비해 매우 빡빡하다. 일반 고교의 수업이 오후 2시30분이면 끝나는 반면 이 곳의 하교 시간은 오후 3시50분. 연구수업이나 대학 학점을 미리 따는 속진수업(AP)에 대한 부담이 큰 편이고, 과제 준비로 늘 빠듯하다. 1∼2시간 거리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은 버스 안에서 숙제를 붙들고 산다. 시험은 예고도 없이 늘 치른다.
그러나 우리 고3처럼 공부로 밤을 샐 것이라는 상상은 오산이다. 학생들은 클럽활동이나 봉사활동을 빼먹지 않는다. 학교가 강조하는 것은 학문적 열정과 개척심을 키우는 것. 때문에 진로를 이공계로 가두는 법도 없다. 졸업생의 60%가 이공계로, 나머지는 인문·예술계로 진학한다. 설립 준비 때부터 18년간 이 학교에서 재직한 패트리샤 그로브스 대외협력 코디네이터는 "많은 학생들이 음악을 선택하고, 시인, 미술가가 되는 것에 나도 놀랄 정도"라며 "뛰어난 학생들은 모든 영역에서 재능을 발휘한다"고 말했다. 입학 코디네이터인 크리스털 페인씨는 "이곳엔 모든 종류의 자극이 있다. 학생이 다른 학생을, 학생이 교사를, 교사가 학생을 자극한다. 교사가 생각지 못한 문제의식이 학생으로부터 싹트고, 교실 안에서 활발한 토론이 이뤄지는 곳이 바로 토마스 제퍼슨 과학고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글·사진=알렉산드리아(미국 버지니아주) 김희원기자 hee@hk.co.kr
■ 미국의 영재학교
토마스 제퍼슨 과학기술고는 미국 버지니아주 6개 카운티를 포괄하는 마그넷 스쿨(Magnet School)이다. 마그넷 스쿨이란 통상의 학군 범위를 넘어 보다 넓은 지역의 학생들을 받아들이는 지역공동학교. 우수생이나 소수민족 학생을 모아 따로 교육하기 위한 것이다.
미국 과학영재학교는 이러한 공립 마그넷 스쿨의 형태를 취한다. 5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뉴욕 브롱스고, 노스캐롤라이나 과학고 등이 그렇다. 공립학교라 학비는 거의 없다. 토마스 제퍼슨은 1985년 산업계와의 파트너십으로 설립된 학교여서 기업체의 지원이 많다. 신입생은 7대1의 경쟁을 뚫고 들어온다.
■ 美영재학교 한인학생들
토마스 제퍼슨 과학기술고에서 만난 한인 학생들은 모두 6명. 하지만 모두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한국에서라면 눈에 띄지않고 묻혀있었을 '평범한' 학생들이었다. 그런 아이들이 여기서 영재로 크고 있었다.
학생들은 현지에서 태어난 1명을 제외하면 공무원이나 기업의 해외주재원 아버지를 따라 왔다가 눌러앉은 경우였다. 어머니만 남은 기러기 가족도 더러 있다. 어려서 유학오지 않은 학생들은 "영어는 모자랐지만 수학 성적이 좋아 입학했다"고 말한다.
워싱턴DC와 버지니아에 많이 사는 우리 교민들은 이 학교를 매우 선호한다. 주미 대사관의 한 직원은 "한인사회에서 자녀가 토마스 제퍼슨에 들어가면 떡을 돌린다"고 말했다. 물론 한인들에겐 명문대 진학률이 중요하다.
한국과 미국의 교육을 모두 겪어본 학생들은 대입을 떠나 고교 생활 자체가 만족스럽다. "우주에 대한 막연한 관심이 있었을 뿐, 과학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이 학교에서 물리를 배우면서 흥미가 깊어져 천문물리를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 12학년 이경은양(사진). 그는 미 항공우주국(NASA) 연구원을 꿈꾼다. 11학년 김수정양은 "한국에선 공부를 많이 했지만, 토마스 제퍼슨에선 많은 것을 배운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하버드반'을 겨냥하고 들어온 학생은 없었다. 그들이 얻어낸 것은 성적이 아니라, 자신의 적성과 능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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