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어린 분단사를 떠안은 채 반 세기를 묵묵히 견뎌온 죽음의 땅 비무장지대(DMZ)가 다시 생명의 용트림을 시작하고 있다.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 체결과 함께 248㎞의 군사분계선을 따라 남북으로 각각 2㎞씩 형성된 군사적 완충지대 DMZ 907㎢. 사자(死者)의 원한, 산 자의 적개심으로 얼어붙은 이곳 동토지대에 지난 연말 처음으로 남북의 소통길이 뚫리면서 이제 미약하나마 생명의 봄기운이 움트고 있다.
지난달 26일 지뢰제거 작업이 막 끝나고 경의선 남북간 철도·도로 연결공사가 한창인 서부전선 경기 파주시 장단면의 비무장지대. 분단 이후 민간인에게 처음 공개된 이날 현장은 돌연히 터져 나온 북한 핵 위기에도 불구,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9월 지뢰제거 작업과 함께 시작된 철도·도로 연결 공사가 막바지에 이르면서 불과 100여m를 마주 보고 남과 북의 포크레인과 덤프 트럭들이 분주히 땅을 파고, 철도 궤도를 실어 날랐다.
남측은 비무장지대 1.8㎞ 중 철로 설치를 불과 300여m만 남겨뒀고, 북측은 철도 노반 공사를 끝낸 상황. 간이 철조망과 남북 초병들만 없다면 여느 공사 현장과 다를 바 없는 여유와 평화로움이 가득했다.
현장에 나와있는 철도청 직원은 "저기 북측에서 사용하고 있는 덤프트럭과 굴삭기가 바로 우리의 현대 제품"이라며 "남북이 이만큼 서로 가까이 닿아 함께 일한다는 사실이 보고 있으면서도 차마 믿어지지 않는다"라고 연신 감회에 젖었다.
이곳에서 3개월째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는 강동우(姜東宇·21) 상병은 "때로 긴장되기도 하지만 통일의 단초를 여는 장엄한 역사적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말할 수 없이 뿌듯하고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이튿날 중부전선인 강원 철원군 양지리 철의 삼각지대 전망대에는 학생들이 DMZ 단체견학을 나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개심을 키우는 반공학습 코스였지만 지금은 다들 북녘 땅을 바라다보며 통일의 희망을 그리고 있다.
그렇지만 분단은 여전히 완강한 현실이다. 경의선 연결 현장에서도 마찬가지. 폭 8m의 남북간 임시도로는 곧바로 차량이 오갈 수 있을 만큼 닦여졌지만 군사분계선(MDL) 통과절차가 합의되지 않아 개통이 지연되고 있었다.
이달 중순이면 경의선 철도 공사가 완료되고 도로는 5월에, 그리고 동해선 철도와 도로는 가을이면 완공될 예정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그러나 "유엔사 간섭을 받지 않으려는 북측 요구 등으로 MDL 통과절차 합의가 계속 늦어지고 있다"며 "최근 북핵 파동도 이어져 남북의 왕래는 또 한걸음 늦춰지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인간에게 죽음의 땅이 돼온 이곳은 자연에게는 벌써부터 생명의 땅이 돼 있었다. 인적이 끊긴 50년 동안 자연은 DMZ를 천혜의 생태낙원으로 바꿔 놓았다.
분단 전 장단역사와 장단면 사무소 등이 있던 곳에는 초목이 빼곡하게 자라 있었다. 녹슨 옛 레일 위로 우람하게 자라난 참나무가 자못 무심한 자태로 서 있었고, 분단 전 논으로 쓰였을 땅은 갈대숲이 무성한 습지대로 변했다. 때마침 고라니 암수 한 쌍이 낯선 이를 반기듯 들판을 가로질러 뛰어 지나갔다.
경기 연천군 중면 횡산리의 DMZ를 가르는 임진강을 따라 국제적 보호조류인 두루미들이 서로 짝을 지어 한가로이 먹이를 찾아 다녔다. 전세계에 불과 1,000여 마리 안팎 밖에 남지 않은 두루미의 절반이 연천과 철원의 DMZ에서 겨울을 난다.
두루미만이 아니다. DMZ에 서식하는 동식물 종은 무려 2,800여종이나 되고, 이중 한마리 한마리가 귀중하기 이를 데 없는 멸종위기종이 표범, 독수리 등 140여종에 이른다. 환경운동연합 황호섭(黃鎬燮) 생태보전팀장은 "세계적인 멸종위기종이 가장 긴박한 군사적 대치 지역 내에 자신의 서식처를 갖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라며 자연의 경이로운 생명력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한국일보는 새해를 맞아 환경운동연합과 공동으로 분단 이후 처음 DMZ와 민통선 지역의 생태계를 정밀 탐사, 시리즈로 나누어 연재할 계획이다.
/파주·연천·철원=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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